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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79 February 2026

의료와 인문

◎ 의학교육의 본(本)과 말(末)

권 복 규이화의대 의학교육학교실

“시간은 여전히 아카데믹 헬스센터가 제공해야 하는 풍부한 교육 환경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 남아있다. 시간이 없으면 교수들은 제대로 가르칠 수 없고, 학생과 전공의들도 효과적으로 배울 수 없으며, 연구자들은 문제를 제대로 연구할 수 없다”라고 미국 의학교육의 권위자 케네스 러드머러(Kenneth Ludmerer)는 20세기 미국 의학교육의 역사를 다룬 그의 책 “치유의 시간”에서 말한다. 이는 너무나 당연해서 더 이상 되풀이 할 필요도 없다.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지금, 우리의 의학교육에 가장 필요한 자원은 사실 건물도, 시설도, 우수한 장비가 아닌 바로 “교수”와 “교수의 시간”이다.

지난 5년을 돌이켜보면 의학교육자에게는 최악의 시간이었다. 2021년부터 우리는 COVID-19 대유행을 겪었고, 마땅히 강의실과 실습실에서 만나야 할 학생들을 온라인에서 만나야 했다. 학생들 상호 간의, 선후배 간의, 스승과 제자 간의 상호작용과 의과대학의 숨은 교육과정(hidden curriculum)을 통해 길러져야 할 의사로서의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기대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병동 실습도 최소한에 그쳐야 했고, 역병의 한가운데서 맞서 싸워야 할 교수를 비롯한 의료진들은 학생들에게 관심을 쏟을 여력과 시간이 없었다. 간신히 역병이 잦아들어 한숨 돌리나 싶었더니 이제는 정치가 만들어낸 더 고약한 질병이 의료계를 초토화시켰다. 2024년부터 시작된 의정사태는 의대생 전원이 일 년 반 이상 학교를 떠나는 초유의 사태를 만들었고, 무분별한 증원과 더불어 24년과 25년의 신입생이 함께 학교를 다녀야 하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일을 저지른 뒤 정부의 대책이란 안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정부 당국자는 교수 1인당 학생 수가 아직은 충분하다느니 하는 식의, 의학교육에 대해 전혀 무지한 발언을 아무 부끄러움 없이 하고 있고, 의학교육을 개선한다고 졸속으로 만든 대책들을 마치 선심 쓰듯 생색을 내며 내놓고 있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일부 의학교육 전문가들이 그에 부화뇌동하며 마치 무슨 “선진적인” 의학교육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처럼 주장하고, 정부의 힘을 빌려 자신들이 그 전도사인 양 행세하는 모습이다. 통합교육, 연구 진흥과 의사과학자, 공감과 인성교육, 맞춤형 진로 교육, 전문직 간 교육, 지역 밀착형 교육 등등 모두 좋은 말들이다. 하지만 의학교육의 근본은 진료를 할 수 있는 의사를 양성하는 것 아닌가? 이것이 바탕이 된 후에 비로소 연구든, 지역사회봉사든, AI 활용이든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나?

근대의학이 형성된 지 150년가량이 지났지만 의학교육의 왕도는 여전히 튼실한 의과학 지식의 바탕 위에서 환자를 보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고, 이는 안전한 교육 환경에서 교수의 세심한 지도 하에 가능한 것이다. 실제 환자를 보는 만큼 효과적인 교육 방법은 없고, 어떤 시뮬레이터나 표준화 환자(SP)도 이를 능가하지 못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교수가 학생 개인에게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여전히 의학교육의 본질은 도제 교육을 벗어날 수 없으며, 실제 환자를 보기가 어려우니 궁여지책으로 표준화 환자나 시뮬레이터를 도입하는 것이다. 최근에 유행하는 포트폴리오 평가도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세심하게 평가하는 교수의 역할이 핵심인 것이다. 물론 이를 제대로 하려면 교수의 품과 시간이 정말 많이 들어간다.

불행히도 우리 대학병원은 충분한 교수 인력, 그리고 교육에 할애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가져본 적이 별로 없다. 의대 임상교수는 대부분 번아웃에 시달리는데 만성 점수가 정책 하에서 대학병원을 유지하려면 그러한 과중한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열악한 근무 환경은 더욱 악화되고 있는데 무분별한 증원은 그러한 교육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 사회는 아카데믹 메디신을 “양질의 의료”로 소비할 생각만 있을 뿐, 그것의 본령은 교육과 연구를 통해 의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 양질의 의료라는 요구에 치여 의대 교수가 제대로 교육과 연구를 하지 못한다는 건 마치 기근이 들었다고 종자를 까먹는 일과 비슷하여 지금 당장은 어찌 넘어가더라도 다음 세대는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아무리 커리큘럼을 이리저리 바꾸고, 신기한 첨단 기자재를 도입한다 하더라도 교수의 시간이라는 가장 귀중한 교육자원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모두 헛일이 될 터이다. 교육과정과 평가, 기자재 등은 의학교육의 뿌리가 아닌 말단에 불과하다. 뿌리가 튼튼하게 자리 잡지 못한다면 이는 금세 쓰러지게 될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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