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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29 July 2021

1분 소확행

◎ 비극적 샹송의 주연, 에디트 피아프

강 길 선 전북대학교 고분자나노공학과

인류가 지탱하여 온 주된 원동력 중의 하나가 위대한 사랑이다. 여러 가지 사랑 중에 일생동안 꼭 겪어야 할 사랑중의 하나가 남녀 간의 사랑이다. 이 사랑이 순탄하거나 지고지순한 사랑은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자극적이고 회자되는 사랑이 비극적 사랑, 비련(悲戀)이다. 너무나도 사랑했으나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진, 여기에 더하여 삶 자체가 비극적이었고 이의 처절한 노래가 뭇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다면 이보다 참담하고 애가 타는 비극적 사랑이 어디 있으랴!

이 비련의 주인공이 샹송의 여제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이다. 1915년 파리의 곡예사였던 아버지,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계 혼혈 가수인 어머니 사이에서 에디트 지오바나 가시옹의 본명으로 태어났다. 유아기에 할머니가 경영하는 매춘업소에서 창녀들 사이에서 성장하였다. 전쟁‧가난‧고생의 환경 때문에 영양실조와 각막염으로 고생하였고, 평생 큰 키가 142cm이었다. 작은 연유로 별명을 참새, Piaf라고 지었고 검은 의상으로 평생을 지냈다.

14세에 아버지가 찾아와 곡예단으로 프랑스 전역을 떠돌다 1년 만에 거리의 가수로 독립하였다. 첫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았으나 죽었다. 20세에 파리 피갈 거리에서 버스커를 하다 나이트클럽 사장 루이 레플리에게 발탁되었다. 인기가 올라갔으나 과거가 발목을 잡았다. 설상가상으로 루이가 조직폭력배들의 총에 죽고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 정열적으로 본인의 혼을 불태우는 에디트 피아프 / 142cm의 단아한 모습을 부각하기 위하여 항상 검은 옷을 입었다.
/ 이브 몽탕과 에디트 피아프의 행복한 시절 (1946). 그러나 인기가 오른 몽탕은 떠났다. >

작사가 레이몽 아소를 만나 “종의 아이들: Les Mômes de la Clôche(1936)”, “나의 외인부대 병사: Mon Légionnaire(1936)”, “나는 사랑과 함께 춤을 췄어: J'ai Dansé avec l'Amour(1941)”으로 이미지 쇄신에 성공하였다. 프랑스 국민작가인 장 콕토(Jean Cocteau)의 ”냉담한 미남, Le Bel Indifferent (1940)“ 희곡으로 프랑스 최고의 배우가 되었다. 장과는 예술적 우정을 죽을 때까지 나누었다. 수많은 작곡가들은 에디트에게 곡을 주고 싶어 했다.

숱한 남성들을 섭렵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이 부족하였던 에디트는 평생 사랑을 갈구하였다. 1944년 카바레 물랭루즈에서 이브 몽탕(Yves Montand)과 사랑에 푹 빠졌다. 15분 만에 직접 작사‧작곡한 것이 ”장밋빛 인생(La Vie En Rose, 1946)“이다. 이브 몽땅에게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느껴 “그가 나를 품에 안고 나지막이 속삭일 때면/인생이 온통 장밋빛이 된 답니다/그가 내게 사랑의 말을 할 때는/나를 행복하게 한 답니다”라고 온통 장미빛인 사랑을 노래하여 사랑에 빠진 대표적 노래가 되었다. 이브의 인기가 올라가자 예정된 것처럼 떠났다.



1948년 미국 브로드웨이에 샹송을 올려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미국 진출이 불행의 출발점이 될 줄이야! 미국 공연 중, 세기의 비련의 사랑의 주인공인 미들급 세계 챔피언 프랑스 권투선수 그리고 세 아이의 아버지인 유부남, 마르셀 세르당(Marcel Cerdan)을 만나게 된다. 1949년 에디트를 만나기 위해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오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헤어날 수 없는 충격의 에디트는 교령술까지 동원하여 마르셀의 영혼과 교신하려 하였다! 항상 죽음에 대하여 생각을 했다. 비극적 남성편력의 결말을 에디트 자신이 작사‧작곡한 노래가 “사랑의 찬가 (Hymne a Lamour)”이다. 비극적인 만큼 더욱더 찬란한 사랑의 세레나데이며, 샹송의 최고봉이며, 대표적인 곡이다.



푸른 하늘이 우리들 위에 무너져 내려 앉을지 모르고/ 대지가 허물어질지 모른다 해도/ 당신이 만약 나를 사랑해주신다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사랑이 매일 아침 내 마음에 넘쳐흐르고/ 내 몸이 당신의 손아래서 떨고 있는 한/ 세상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나에게 있어서는 그런건 중대한 문제도/ 대단한 문제도/ 대단한 일도 아니에요/ 당신이 사랑해주시는걸요// 만약에 당신이 그렇게 바라신다면/ 세계의 끝까지라도 따라가겠어요/ 금발로 머리를 물들이기라도 하겠어요/ 만약에 당신이 그렇게 바라신다면

< 2019년 6월에 방문한 프랑스 니스의 해수욕장. 리구리아 해에서 계속 밀려오는 파아란 파도는 에디트 피아프가 끊임없이 갈구했던 사랑을
계속 싣고 온다. / 해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박찬흠 교수 / 니스 해변의 해수욕객들. 프랑스 사람들의 자유분방함을 느낄 수 있었다.
/ 샹송과 함께 거닐었던 니스 해변 >

계속되는 결혼과 파혼, 치명적 교통사고, 모르핀 중독에 걷기도 힘들었던 1950년 “파담, 파담 (Padam, Padam)”을, 1960년 “아니요,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을 대히트시키고 1963년, 47세로 간암으로 타계하였다. 그녀의 부고를 전해들은 쟝 콕토는 충격으로 4시간 후에 서거하였다. 1952년 쟈크 필스와 결혼, 1956년 샤를 아즈나부르와 음악적 동지애, 그리스 가수 조르주 무스타키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이렇듯 에디트는 숱한 남성과 열정적(eros), 유희적(ludus), 동료적(storge), 논리적(pragma), 소유적(mania), 이타적(agape) 등의 모든 사랑을 나누다 짧은 생을 마쳤다.



결론적으로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우한 인생의 평생 모자랐던 사랑을 채우려 ‘장밋빛 인생’은 결코 아니었고 ‘사랑의 찬가’의 가사만큼 사랑도 못하였고 또한 죽어가면서 많은 ‘후회를 하였을 것’이다. 그만큼 비련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사랑이 빛났으리라. 포르투갈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가 본인의 한을 파두로 승화를 시켰다면, 프랑스의 에디트는 본인의 비극적 결말을 샹송의 세계화로 승화시켰다. 그래서 이 인생만큼 더 극적인 것은 없으리라!

우리에게 알려진 피아프의 노래들은 주로 사랑의 노래이나 대부분이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슬픈 사랑이야기다. 이별하는 연인들, 평판이 나쁜 거리의 사람들, 선원, 창녀 등 이 세상에서 불행과 가난을 겪는 소외된 사람들을 노래했다. 소외된 사람들이 체념하면서 힘든 운명을 받아들이고, 반복되는 불행과 시련 속에서도 삶에 집착하는 희망 등을 노래했다. 이러한 노래는 사실주의 샹송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산업화 이후의 새로운 노동자 계층의 힘든 삶과 사회를 고발하는 노래의 사회적 샹송으로 나뉜다.

샹송은 프랑스의 대중가요로써 11세기부터 시작하여 16세기에 자리를 잡고 1900년대 프랑스 내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오늘 소개해 드리는 에디트 피아프가 세계 2차 대전 종전 전후에 장밋빛 인생과 사랑의 찬가가 세계화에 성공하고 이브 몽탕의 낙엽, 줄리엣 그레꼬, 쟈크 브렐, ‘쌍 투아 마미’와 ‘눈이 내리네’의 살바토르 아다모(아다모는 엄밀히 말하자면 이탈리아/벨기에 인이다, 노래만 프랑스말로 했을 뿐이다.) 등이 우리나라에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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