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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02 February 2019

1분 소확행

- 첫 번째 이야기 - 맥주 공부를 하며 즐기는 소확행

배 상 준 외과전문의

술을 좋아하시나요? 왜 좋아하시나요? 취하는 기분이 너무 좋다는 이유만으로 술을 마시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엔 수십 년 동안 너무 많이 취해 봤기 때문입니다. 술을 취하려는 목적으로만 마시진 않기 때문에 가뜩이나 진료하느라 힘들고 바쁜 와중에 내일 모임에서 어떤 술을 마실지에 대한 고민을 가끔씩 하게 됩니다. 이 때, 여러분의 뇌에 입력된 각각의 술에 대한 기억과 선입견이 작동합니다. 맥주와 와인은 약간 다른 선입견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맥주 마시러 갈 땐 츄리닝 차림에 슬리퍼를 끌고 가도 어색하지 않은데, 와인을 마시러 갈 땐 에나멜 구두에 정장까지는 아니더라도 한번 쯤 거울을 보며 어떤 옷을 입고 갈지 고민하게 됩니다. 와인 중에서도 샴페인은 축하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언젠가 친한 후배가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형, 저 이혼했어요.” 제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래, 샴페인 마시러 가즈아~~!!”

거의 모든 사람들은 맥주를 “편하고 부담 없는 술”로 여깁니다. 오죽하면 “맥주「나」 한 잔 하러 가자”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제게도 맥주는 편안함과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저는 맥주를 생각하면 20대 초반 시절의 짜릿하고 상쾌했던 어떤 기억이 항상 떠오릅니다.

공부와 시험에 찌들어 살던 20대 초반의 의과대학 시절로 기억이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땐 토요일에도 오전 수업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시험이 없던 토요일 오후, 대충 점심을 먹고 기숙사 농구 코트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동료들과 농구를 했던 것 같습니다. 땀에 쩐 후끈거리는 몸을 찬물로 싸악 정리한 후 무스를 바르고 우르르 몰려간 신촌의 어느 펍에서 자리에 앉기도 전에 주문한 생맥주를 입 안으로 full drip 하곤 했습니다. 해부학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만, 입 안으로 들어간 맥주가 손가락 끝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었습니다. 그 기억 때문에 맥주는 제게 지금까지의 어떤 것보다 짜릿한 느낌으로 입력되어 있습니다. 저는 아마 죽을 때까지 맥주를 시원하고 짜릿하게 마시고 살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맥주를 퍼 마시던 20대 의과대학생은 세월이 흘러 외과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1년에 한 두 번씩 외국 학회에 참석하던 중 절망스러운 상황이 생겼습니다. 나름 동료들 사이에서 맥주통으로 알려진 제가 미국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메뉴판의 맥주 리스트를 읽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귀국하자마자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모든 맥주 책을 주문하여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는 맥주 관련 서적이 10권도 안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맥주는 수메르인들이 5000년 전부터 마셔 온 술입니다. 서양의 문화와 역사가 맥주 한 잔에 녹아 있습니다. 맥주를 공부하다 보니, 유럽과 미국의 역사가 쏙쏙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알코올 발효를 공부하다 보니, 과학을 다시 한 번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블루문 맥주를 마시며 블루문(blue moon)에 대해 공부하고, 워털루 맥주를 마시며 나폴레옹에 대해 공부하는 그런 식입니다. 문화에 대한 식견도 넓어졌습니다. 귀가해서 소파에 앉아 맥잔잔 마시며 잠들던 40대 아저씨가 책상에 앉아 인문학 공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덧 맥주는 제게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되었고, 저만의 소확행은 시나브로 즐거운 일탈이 되었습니다.

외과 의사가 본업인 제가 여러 학회에서 강연을 합니다. 맥주와 인문학 강연입니다. 제 강연을 저는 “짜깁기”라고 표현합니다만 어쨌건 청중들이 생각보다 재미있어 합니다. 외과 의사라는 틀에 박힌 삶을 살다가 강연을 핑계로 지방에 가서 옛 지인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탈입니다. 가끔씩 지인들이 술집 메뉴판을 찍은 후 카톡으로 전송합니다. “오빠, 여기서 어떤 술 마셔야 해요?” 심지어 유럽, 미국 학회에 참석한 지인에게서도 메뉴판 사진이 띵동~ 날아옵니다. 기꺼이 화살표 첨부하여 간단한 설명과 함께 추천해 드립니다.

외국에 가서 맥주를 편하게 주문하기 위해 맥주 공부를 시작했을 뿐인데, 저는 맥주 강연을 하는 희한한 아저씨가 되어버렸습니다. 맥주를 만들지도 않고, 팔지도 않는데 맥주로 돈을 번다고 부러워하는 동료들도 가끔 있습니다. 소확행을 꾸준히 실천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즐거운 일탈이 찾아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유부남의 애인 만들기 따위 같은 위험한 일탈보다 일상에서 좋아하는 것을 소확행으로 만들고, 소확행이 쌓여 즐거운 일탈이 되길 기원합니다.

다들 “즐맥” 하시고 즐거운 일탈하십시오. 꾸벅~~!!

대한의학회(http://www.kams.or.kr)
(06762) 서울특별시 서초구 바우뫼로 7길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