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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80 March 2026

의료와 인문

◎ 의사의 역사(1)

김 택 중대한의사학회 회장

1. 서구 의사의 전문직 형성 과정
서구 의사들이 전문직의 길로 들어선 첫 단계는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 유럽에 대학이 출현했던 11-12세기와 시기가 맞물린다. 중세 대학들은 대부분 교양학부, 신학부, 법학부, 그리고 의학부를 설치했다. 이 가운데 의학부의 설치는 대학을 중심으로 한 의학 연구의 연속성과 대학 출신 의사 공동체의 영향력을 오늘날까지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학을 졸업한 중세 유럽의 의사들은 거의 대부분 내과 의사(physician)로서 수적으로 아주 희귀했고 도시의 부유한 식자층에 속했던 까닭에 치료 대상 역시 권력자와 상류 계급에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의료인 사이에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위계질서가 나타났다. 즉, 대학을 졸업한 내과 의사들을 정점으로 그 하위에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외과 의사(surgeon)와 약제사(apothecary)가 포진하게 된 것이다. 특히 내과 의사와 외과 의사의 구별은 북유럽에서 더 엄격했는데, 이는 남유럽인 이탈리아 이외 지역의 대학 교육 과정에 수술이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위계는 대체로 19세기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12세기에 이탈리아 살레르노 대학을 시작으로 대학에 의학부가 설치되면서 법학처럼 의학 역시 전문직 학문으로서 그 전공자에게 공식적인 면허 발급을 통해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의사들을 위한 면허나 규제가 제도적으로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중세 후반인 14-15세기에 이르러서였다. 게다가 이러한 제도들은 모든 지역에서 일관되게 효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이에 따라 16세기 이후 내과 의사들의 협회나 외과 의사들의 조합(guild) 같은 각 지역별 동업자 조직들이 이익 집단으로서 독자적인 힘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국가의 간섭이나 통제가 없던 19세기 이전에는 지금과 달리 누구나 의료 행위가 가능했으므로 이러한 지역별 동업자 조직들이 상대적으로 강한 구속력을 행사했다. 동업자 조직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들은 경쟁 관계에 있던 다양한 유사 의료직종들의 의료 행위를 규제할 수 있는 법률의 입법을 지방 정부, 나아가 국가에 요구했다.

각 나라마다 사정이나 시행 방식은 전부 달랐지만 근대 국가의 성립과 함께 대체로 19세기에 이르러 의사들에게만 국가 단위의 배타적인 의료 독점권, 즉 면허권이 부여되었다. 이와 함께 미국처럼 구질서가 존재하지 않았던 신생국을 제외한 나머지 유럽 국가들에서는 중세 이래 지속되었던 의사 집단 내부의 위계질서가 무너져 의사 직종의 단일화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의료 독점권이 인정되고 의사 직종 내부의 이해관계가 단일해지는 데 힘입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면 유럽과 미국에서 의사직의 전반적인 전문화가 확립될 수 있었다.

이는 사실 의사들과 국가 양쪽의 이해가 서로 부합한 결과였다. 의사들은 자신을 포함한 다양한 의료직종의 수적 증가와 내부 분화에 따른 경쟁 속에서 의료의 독점을 보장받기 위해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면허제도 시행이 시급했다. 한편, 국가는 국가대로 국가 단위의 위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중보건 행정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관련 전문지식을 보유한 의사들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양측의 입장 차이는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발생한 각 국가의 사회 변동 양상에 따라 의사의 사회적 지위에 미묘한 차이를 가져왔다. 국가별로 보자면 먼저 영국, 프랑스처럼 의사들이 속한 시민 계급이 사회 변혁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국가에서는 의ㅇ사의 사회적 지위와 직업적 자율성이 잘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독일, 이탈리아 같은 후발 국가에서는 의사의 전문직화가 국가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아졌고 직업적 자율성 역시 저하되었다.

전문직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서구 의사들은 국가로부터 배타적인 의료 독점권을 부여받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여타 의료직종들을 배제한 채 소수의 의사들만 의료 시장 전체를 독점하는 이러한 직업적 특권은 민주주의 사회의 정치 원리인 평등과 자본주의 시장의 경제 원리인 경쟁에 반하는 구시대의 신분적 특권과 사실상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서구 의사들은 사회를 향한 설득 작업을 병행해 나갔다. 이는 의사 직종 외부와 내부 양면에서 진행되었다.

우선 외부적으로는 의사의 전문 지식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되기 때문에 사회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이른바 봉사 이데올로기를 천명하였다. 이와 함께 무자격자에 의한 무책임한 의료 행위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므로 사회가 무자격자들을 규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부적으로는 교육의 강화를 통해 의학 지식을 표준화함으로써 학문의 질적 수준을 높였고, 고도의 직업윤리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구성원들의 윤리의식을 강화하였다. 또한 이러한 기준에 미달하는 구성원을 자발적으로 배제해 나감으로써 사회에 의사들 스스로 자율적인 내부 규제가 가능함을 역설하였다.

오늘날 서구 의사들이 누리는 전문직의 특권은 이상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사회와의 계약을 통해 의사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전문직으로서 의사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은 시대적 상황에 따른 계약 조건의 변화에 의해 바뀔 수 있다.

2. 근대 이후 동아시아와 한국 사회의 서구 의학 도입과 수용 및 전개 과정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국의 서구 의학 도입과 수용 및 이후의 전개 과정은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각국의 문호 개방 전후 사정과 깊은 연관이 있다. 동아시아 3국은 모두 19세기에 이르러 외세와 불평등조약을 맺고 강제로 문호 개방, 즉 개항을 당한 공통점이 있다. 연대순으로 보면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청국)에 승리한 영국이 1842년 중국을 개항시켰고, 미국이 자국 함대를 보내 무력시위를 한 끝에 1854년 일본(에도 막부)을 개항시켰으며, 일본은 미국에 배운 대로 1876년 한국(조선)을 개항시켰다. 동아시아 3국은 외세에 의한 강제 개항을 통해 근대화(서구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우승열패의 제국주의 질서 속에서 살아남아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는 서구 문물의 도입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외세의 침략에 직면하고서야 비로소 자각한 것이다. 서구 의학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1) 중국
중국은 3국 중 가장 먼저 개항하였으나, 이후 지속된 오랜 혼란과 대외 전쟁의 잇따른 패배로 19세기 말에 이르자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 열강에게 광대한 영토의 절반 가까이를 빼앗겨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였다. 1912년 청국 멸망 후 민국 시기에 이르면 끝없이 이어진 내전에 더하여 중일전쟁까지 발발하면서 중국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까지 극심한 정치적 혼란에 시달렸다. 이러한 혼란상은 서구 의학의 도입과 수용 과정에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개항 이래 지속된 강력한 중앙정부의 부재 상태가 의학교육, 의사양성, 의사면허, 위생행정 등 의료의 전 방면에 걸쳐 제도적 표준화와 체계화를 지체시켰던 것이다.

그 결과, 전통 의학 기반인 다수의 ‘중의(中醫)’와 서구 의학 기반인 소수의 ‘서의(西醫)’ 간 갈등은 물론이거니와, 서의 내부의 갈등도 심화되어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극심한 파벌 대립 및 권력 다툼이 이어졌다. 중의는 다수였음에도 법적, 사회적 차별을 받았고, 서의 역시 의학교 졸업 유무 및 국내외 출신 의학교에 따라 사회적 차별을 받았던 것이 이러한 갈등의 주요 이유였다. 중국에서 중의가 서의와 동등한 수준의 법적 지위를 보장받게 된 것은 중의와 서의를 포괄하는 규정인 ‘의사법(醫師法)’이 반포된 1943년의 일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은 1950년대부터 주요 국가 정책 중 하나로 중의학과 서의학을 결합하는 이른바 ‘중서의결합(中西醫結合)’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중의와 서의 외에 다수의 중서의결합 의사가 배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일본
일본은 개항 후 제국주의 열강의 외압이 중국보다 크지 않았다. 개항을 전후하여 중국의 태평천국운동, 유럽의 크림전쟁, 인도의 세포이 항쟁, 미국의 남북전쟁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발발하여 서구 열강이 일본에 관심을 가질 만한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고,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왕정복고를 통한 중앙집권의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시행하여 근대화와 자본주의화에 성공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동아시아 3국 중 유일하게 서구와 동등한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중국과 달리 일본의 전통 의학이자 에도 막부(江戸幕府) 시대의 공식 의학이었던 ‘한방의학(漢方医学)’을 배제하고 1870년 독일 의학을 정부의 공식 의학으로 채택하였다.

에도 막부의 오랜 쇄국 정책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정부가 처음부터 서구 의학 중심의 일원화를 결정하고 추진해 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첫째, 일본은 이미 18세기부터 나가사키 항구를 통해 제한적으로나마 ‘난방의학(蘭方医学)’, 곧 네덜란드 의학을 도입하였으며, 이후 네덜란드어로 된 의서들이 번역되고 각지의 난학사숙(蘭學私塾)을 통해 다수의 ‘난방의(蘭方医)’들이 배출된 상태였기 때문에 개항 후 접한 서구 의학은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둘째, 보다 직접적으로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세력이 추구한 바가 급진적이고도 전면적인 서구화였다는 데 있다. 서구식 부국강병을 추진하던 메이지 정부 입장에서 기존 한방의학은 서구 의학과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군진 의학에서 절대 시되는 외과적 치료의 우수성뿐 아니라, 국가 차원의 공중보건 및 위생행정의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서구 의학이 월등히 낫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메이지 정부는 당시 학문적으로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은 독일 의학을 전범으로 채택하고 의료의 전 방면을 독일 의학 중심으로 개편해 나갔다. 독일이 일본과 마찬가지로 국가 주도하에 전 영역에 걸친 근대화를 추진하였다는 사실 또한 메이지 정부가 독일 의학을 채택하는 데 주요한 이유로 작용하였다. 일본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 패한 뒤 미군정 시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미국 의학을 도입하였으나, 일본 의료계에는 지금도 여전히 독일 의학의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다.

3) 한국
한국은 동아시아 3국 중 가장 늦게 개항하였다. 오랜 쇄국 끝에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를 체결하고 개항한 조선은 이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대립한 열강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었다. 결국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으로 각각 청국과 러시아에 승리한 일본이 서구 열강의 묵인하에 조선을 최종 지배하게 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1905년 일본의 보호국이 된 데 이어 1910년에는 일본에 강제 병합되어 국권을 상실하고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의학 역시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통 의학인 한의학이 제도적으로 배제되고, 일본식 독일 의학을 중심으로 한 서구 의학 위주 체계로 재편되었다.

일본과 달리 조선은 개항 후에야 비로소 서구 의학을 본격적으로 접할 수 있었다. 18-19세기에 일부 유학자들이 저술을 통해 서구 의학을 단편적으로 소개하였으나 정부의 서학(西學) 억압으로 서구 의학은 실용화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다. 1897년 대한제국 성립 이후 조선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의학 분야에서도 독자적인 근대화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시기 한의학에 대한 비판론이 제기되기 시작했지만 전면적인 한의학 부정으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따라서 대한제국의 기본적인 개혁 노선은 서구 의학과 한의학의 병용이었다. 이러한 병용 정책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면서 단절되었고, 이후 한국은 식민지 의학 체계라는 굴절된 형태로서 서구 의학을 전면 수용하게 되었다.

한국의 식민지 의학 체계는 크게 조선총독부의 정책적인 식민 의학 체계와 서구 기독교 선교회들이 파송한 선교의사 중심의 선교 의학 체계로 양분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에서는 이 두 체계가 서로 경쟁 또는 협력하면서 양립해 나갔다. 그러나 1941년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개시하고 선교사들을 체포하여 구금하거나 강제로 추방하면서 1884년 이후 약 60년간 지속되었던 선교 의학 체계가 붕괴되었다. 한국은 1945년 광복과 함께 미군정 시기를 거치면서 미국식 의학 체계로 재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지금도 의료계에 일본의 식민 의학적 잔재가 남아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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