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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80 March 2026

의료와 테크

◎ AI 기술은 의료서비스의 ‘부족’을 진정 해소할 수 있는가?

장 혁 재온택트헬스 대표

오늘날 의료의 눈부신 발전 과정은 불가능했던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온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오랜 ‘시간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어 왔다. 응급실에서의 몇 분, 중환자실에서의 몇 시간이 생명을 좌우한다는 사실은 의료인이라면 누구나 체감하고 있다. 특히 중증·난치성 질환을 다루는 임상 현장에서는 단 한순간이라도 치료의 시간을 앞당기기 위해 막대한 자원과 의료인의 헌신이 투입되어 왔으며, 이러한 노력은 의료 발전을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의료 서비스가 의료기관의 울타리 안에서 비로소 시작될 때에는 이미 효과적인 개입의 시점을 상당 부분 놓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질병은 진행된 이후에는 진단이 쉬워지지만 치료는 어려워지고, 초기에는 진단이 어렵지만 치료는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질병은 갑작스럽게 발생하지 않는다. 질병은 서서히 자라나 오랜 시간 침묵하다가, 증상으로 드러난 이후에야 비로소 ‘진단’이라는 이름표를 얻게 된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발전시켜 온 의료 시스템은 이러한 ‘진단’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작동한다. 이 과정에서 수년, 혹은 수개월의 시간이 이미 지연된 뒤에야 “시간이 중요하다(times matter)”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의료가, 병원이라는 공간 안에서 몇 분 혹은 몇 시간을 아끼는 노력을 뒤늦게 시작하는 구조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지연된 의료 개입은 필연적으로 높은 비용을 요구한다. 질병이 진행된 이후의 치료는 복잡하고 고가의 의료 자원을 필요로 하며, 환자를 다시 ‘건강한 일상’으로 온전히 되돌리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의료 접근성의 격차, 의료 인력의 부족, 지역 간 의료 불균형 역시 이러한 구조 속에서 더욱 심화된다. 우리가 말하는 의료 서비스의 ‘부족’은 단순히 병상이나 의사의 수가 모자라는 문제가 아니라, 검증된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 시점에 충분히 도달하지 못하는 구조적 문제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AI 기술은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AI는 과연 의료 서비스의 부족을 진정으로 해소할 수 있을까. 이는 흔히 제기되는 ‘AI가 의료를 대체할 수 있는가’라는 경쟁의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핵심은, 이미 부족한 의료 인력이 더욱 희소한 의료기관의 물리적 문턱을 넘어선 공간에서, AI를 통해 의료의 ‘시간’을 얼마나 앞당길 수 있는가에 있다. AI는 방대한 의료 데이터를 기반으로 질병의 미세한 신호를, 기존의 전통적인 검사 해석만으로는 발견하기 어려운 수준에서 조기에 포착하고, 증상이 나타나기 이전 단계에서 위험을 인지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의료를 병원 중심의 사후 대응에서 벗어나 일상 속에서 작동하는 선제적 관리로 확장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AI 기술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누구나 지연 없는 진단(timely diagnosis)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의료기관의 물리적 울타리에 국한되지 않은 적극적인 의료 서비스(proactive medicine)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의료의 질을 유지하면서도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오래 건강한 일상(better healthcare)을 누릴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물론 AI는 만능 해법이 아니다. 임상적 검증, 책임 소재, 의료 윤리와 같은 과제들은 여전히 중요하며, 의료인의 전문성과 판단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AI가 의료의 ‘속도’를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의료 개입의 시점을 앞당기는 기술은, 의료 서비스 부족을 완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해답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

의료와 기술의 만남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의 영역에 들어섰다. 앞으로의 의료는 얼마나 많은 치료를 제공할 수 있는가라기보다는, 얼마나 이르게 개입해 궁극적으로 사회 전체의 자원 투입을 절감하고 건강한 삶을 연장할 수 있는가에 의해 평가될 것이다. AI 기술은 그 질문에 답하려 시도하고 있으며, 의료는 이제 그 가능성을 임상 현장에서 검증해 나가야 할 중요한 변화의 변곡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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