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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75 October 2025

의료와 인문

◎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허 윤 정단국대학교병원 권역외상센터

“으... 으음...”
“아이고! 인제야 정신이 드나 보다. 얘야 괜찮니? 어디 아픈 덴 없고?”
“거 호들갑 좀 떨지 맙시다, 애 놀라겄어. 그리고 덤프트럭에 깔린 애한테 아픈 덴 없냐니. 그렇게 말 같지도 않은 말이 어디 있슈?”
“나는 그냥 걱정이 돼서... 너무 그렇게 타박 마셔요. 이 조그마한 게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안쓰러워서 그러죠. 얘야 너 이름이 뭐니?”
“우리 중에 안쓰럽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 거참 유난이네 유난이야. 노래 연습 시간이니 다들 갑시다. 꼬맹이는 아줌마가 챙겨서 오든가 말든가.”

하나둘씩 자리를 떠나고 이제 남은 것은 맘씨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와 꼬맹이뿐이었다.

“많이 놀랬지 아가, 너 몇 살이니? 엄마 아빠는 계시구?”
“8살. 아빠랑 둘이 살아요. 그리고 제 이름 민영이요.”
“아이구 어떡해. 느이 아부지 딱해서 어떡하냐. 혼자 남아 어떡해...”

민영이는 아주머니의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빠가 왜 혼자 남았다는 거지? 좀 이따 나랑 같이 돈가스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좀 수상한 점들이 있긴 했다. 학원에 가던 길이었는데 눈을 떠보니 온통 밝은 빛으로 가득 찬 이곳이었다. 새하얗게 갈아 입혀진 옷에서는 몽실한 담요 느낌이 났다.

“아주머니,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요”
“잘 기억 안 나지? 민영이 네가 오늘 차에 치여서 아주 많이 다쳤단다. 그래서 병원에 오게 된 거야. 아줌마 따라오면 네 모습을 보여줄게.”

일어서는데 민영이의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푹신한 바닥은 솜사탕처럼 소복소복 밟히며 흩어졌다. 마치 구름 위를 걷기라도 하는 것처럼. 끝없이 펼쳐진 고요한 구름 세상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하늘과 구름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는데 갑자기 철문이 나타났다. 이어진 방도 없이 그저 문만 덜렁 서있었다.

“너무 놀라면 안 된다 아가야.”

아주머니가 근심 어린 얼굴로 문고리를 돌리자 커다란 방이 하나 나왔다. 희한한 소리를 내는 침대들이 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그 사이를 오가는데 그들은 두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M/8 이민영」

“저게... 저라고요?”
“아이고 딱한 것. 여기는 중환자실이란다. 네 입에 꽂혀있는 건 인공호흡기라는 거야. 아마도 머리를 많이 다쳐서 혼자 숨을 쉴 수 없는 상태인 것 같구나. 의사 선생님이 민영이 편히 자라고 진정제라는 주사를 주고 계실 거야.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 거고.”
“그럼 아빠는, 우리 아빠는 어디 있어요?”
“아빠는 아마도 저기 저 복도 끝 자동문 밖에 계실 거야. 근데 미안하지만 거기까진 갈 수가 없단다.”

민영이는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주머니 말에 따르면 아빠는 정말로 혼자 남겨진 게 분명했다. 아빠는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고 했는데. 세상 모든 돈을 다 준다 해도 나와 바꿀 수 없다 했었는데. 문밖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치며 울고 있을 아빠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아빠, 아빠...

“여기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제발 방법을 알려주세요. 저러다가 우리 아빠 진짜 죽을지도 몰라요.”
“우리가 찬란한 별빛의 순간을 맞이하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꿈속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게 된단다. 자 이제 노을 질 시간이 돼가니 우린 돌아가야 해.”

다시 철문을 열고 나가니 어느새 구름 세상은 핑크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뭉게뭉게 쌓아 올려진 붉은빛들이 민영이 마음을 적셨다. 한참을 또 걸으니 아까 봤던 아저씨들과 할아버지들이 웅성이며 모여 있었다.

“아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제 오는 거요? 후딱 이리 와 앉아요. 박 씨 아줌마.”
“미안해요. 꼬맹이한테 병원을 보여주고 오는 길이라.”
“시간 없어요. 다들 준비되었지라? 그럼 시, 시, 시작!”

「눈을 뜨기 힘든 가을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 할까」

아까부터 성화를 내던 아저씨도, 농사꾼처럼 보이는 쭈글쭈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도. 십여 명의 어른들이 갑자기 진지한 표정이 되어 노래를 부르니 조금 웃기기도 하였다. 연습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도 음정이 썩 맞지를 않았는데 그래도 모두가 참 열심히였다.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 없어
 바램은 죄가 될 테니까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이 가득한걸」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란다. 그래서 모두에게 이걸로 해달라고 부탁했어.”
“왜 다 같이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그게... 오늘은 내가 별빛이 되는 날이거든.”
“아까 아줌마가 말한 그 찬란한 별빛의 순간이요?”
“그래 맞아.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하구나.”

「가끔 두려워져 지난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 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유일하게 친절해 보였던 아주머니와 만나자마자 이별이라니 왠지 서글퍼졌다. 그런데 의자에 앉아있던 아주머니의 몸이 조금씩 희미해지며 유성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민영아, 저 험상궂게 생긴 김 씨 아저씨 손 붙들고 잘 따라다녀야 된다. 너도 좋아하는 노래 있지? 여기 사람들한테 그 노래 꼭 가르쳐드려. 포켓몬스터 노래 같은 것도 괜찮아. 그리고 나중에 아빠 꿈에 가서 만나면 꼭 안아드리렴. 아빠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네 모습이 될 거야. 씩씩하게 울지 말고 예쁜 얼굴만 보여드려야 돼. 할 수 있지? 꼭이야.”

아주머니는 이제 별이 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그녀가 앉아 있던 의자에는 금빛 가루들만 조금 남았을 뿐이었다.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 거야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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