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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74 August 2025

의료와 인문

◎ Tanzanian의 지혜

장 성 구前 대한의학회 회장

지난 2년간의 엄혹했던 의정 갈등은 엄청나고 돌이키기 힘든 상처를 남긴 채 아직도 근본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을 살펴보면 이미 터져야 했던 일이 정부의 허망한 자충수가 기폭제기 되어 폭발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보면 변화하는 시대적 요구와 편안하게 관성적으로 살아온 세력 간의 이해 상충이 가장 큰 원인 같아 보인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의사에 대한 정부 권력의 철학이 없는 억압정책과 의료 이용에 대하여 비용 지급 대비 과도하고 이기적인 요구만을 해온 국민이 한 축이 되고, 시대적 변화에 따른 의사들의 사고방식의 변화가 일종의 대척점을 이루면서 사회의 구조적 저변에서 알게 모르게 수없이 충돌해 왔다. 수십 연간 지각(crust) 아래 맨틀(mantle) 속에서 들끓는 마그마와 같이 불안하게 공존해 온 갈등이 임계점에 이르러 폭발한 것이다.

전 국민 의료보험 제도의 실시 이후 의료 이용에 대한 국민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정부의 미봉책은 행정력과 때로는 사법의 힘과 언론을 이용한 의사 길들이기에 숙달되었다. 국민은 의료란 내 곁에 항상 있어야 하고 편안한 것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 의사는 환자에게 이유 불문 헌신해야 하는 존재로 확신하고 있어 왔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의사에 대한 정부의 여러 형태의 억압은 ‘심평 의학’이니 ‘사법 의학’이니 하는 조롱 섞인 참담한 말이 의료계에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이는 관료주의적 권력의 만행이고, 전문가의 식견을 인정하지 않고, 힘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전체주의나 패권적 법치주의적 사고의 잔재이다. 과거 전문의가 되려는 의사들은 6개월간 정부가 지정하는 무의촌에 강제로 근무하게 했던 것은 강제노동이나 마찬가지였다. 의사라는 죄 아닌 죄 때문에 국민의 3대 의무 이외에 한 가지 의무를 더 하여야만 했었다.

이 외에도 왜곡된 사회적 통념이 윤리의 쇠사슬이 되어 의사들의 인권을 억압하고 노예화하였다. 의술은 인술이라는 근거가 없는 말의 작폐 또한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했다. 이 말은 조선말에 현대 의학의 도래에 위협을 느낀 한의사가 살아남기 위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선전 문구와 같은 말이다. 이 말이 곧 의사가 지켜야 할 철학과 윤리 그리고 도덕적 의무로 윤색(潤色)되고 분식(粉飾)이 되어 의사의 인권에 족쇄를 채워왔다.

이런 전통적이고 관행적인 사회적 악습이 남아 있는 가운데 젊은 의사들의 삶에 대한 가치관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의사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관행적인 국민의 요구와 행정적 강요나 법률적인 왜곡에 대한 저항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결국 패권주의적 악습과 악법에 대하여 적극적인 저항의 색채가 빠르게 짙어져 가고 있다. 젊은 의사들의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당연한 일이고 의료의 지속가능성을 확립하기 위한 변화의 전환점이다.

한편, 가시밭길 같은 고된 전공의 생활 속에서도 얻을 수 있는 의학적 지식이나 술기의 한계점에 대한 좌절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교수는 전공의의 중간착취자”라는 흉측한 말이 돌발적으로 나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말은 아주 천하고 용인할 수 없는 말이며 지식인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막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척박한 여건 속에 비과학적이고 이성적 논리를 벗어난 윤석열 정부의 어설프기 한이 없는 의료 개혁 정책은 젊은 의사가 희망하고 기대하는 미래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는 가운데 갈등이 고조되면서 의사를 더욱더 노예 다루듯 하고 돈만 아는 패륜아로 몰아붙이자, 분노의 불길이 거센 광풍을 만난 것이다. 다시 말해 의사로서 자유인임을 선언한 젊은 의사들과, 의사를 중세의 노예처럼 압박하는 정부 권력과 개선되지 않는 누더기가 된 의료보험 제도, 그리고 그 권력의 그늘에서 이기주의적 의료 과소비에 익숙해진 대중의 힘이 정면충돌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지금 젊은 의사들의 삶에 대한 개념이 변하고 있다. 환자가 안전하게 진료를 받으려면 의사를 둘러싼 사회적 환경과 제도가 걸맞게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아울러 의사들의 삶과 가치가 온전해야 제대로 환자를 돌볼 수 있다는 서구적 개념의 doctor first의 사고에 아주 익숙해지고 있다. 즉 의사의 삶이 안전하게 보장될 때 그 혜택이 환자에게 먼저 돌아간다는 생각이다. 이것이 10여 년 전부터 서구 사회에 몰아닥친 의사들의 삶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철학적 변화이다. 상대방의 인권을 억압하는 악습과 삶에 대한 가치관의 개념적 차이에서 발생한 충돌은 결코 쉽게 끝나지 않을 듯하다.

대형 의과대학 병원에 책임자로 있을 때 매년 새로운 전문의가 되어 병원을 떠나는 후학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때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던 쓰라린 말을 들었다. “원장님, 제가 전문의가 되었지만 홀로 할 수 있는 수술이 거의 없어요.”라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물론 새내기 전문의가 모두 그런 것은 아니고 부분마취를 통해서 수술을 많이 하는 임상과의 선생들의 호소다. 환자들이 수술을 받을 때 전공의 선생들의 참여를 거부하기 때문에 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환자들의 이런 이기적인 의료 이용 행태는 대한민국의 미래 의료를 걱정해야만 하는 아주 심각한 일이다.

얼마 전 대한의학회가 주관하는 2025년 학술대회에 참석했다. 대한의학회에서 주관하는 학술대회답게 심도 있고 체계적인 여러 session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중 의학교육 세션에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박현미 교수의 강의를 경청했다. 이날 처음 본 박 교수는 영국에서 태어나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외과 전문의이자 의학 교육학을 전공한 한국계 영국인 여의사 선생님이었다. 이분의 강의에서 가슴을 뛰게 한 놀라운 말을 들었다. 박 교수가 탄자니아의 큰 병원에서 직접 경험한 일을 소개하였다. 탄자니아의 대형 병원을 찾은 환자들에게 물어봤다고 한다. “여기서는 경험이 적은 젊은 의사들의 진료를 받을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하여 걱정되는 일은 없는가?” 대부분의 환자는 주저함 없이 즉답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얼마나 좋고, 다행입니까? 잘못이 발생하면 즉시 대책을 세울 수 있는 많은 의사분이 계시잖아요.” 참 놀랍고 아름다운 생각이다. 전공의 선생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조수에 불과한 형편없는 수습생 정도로 치부하고 자기 진료에는 일절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용렬한 마음을 갖은 대부분의 우리나라 국민 정서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2025년 전 세계 197개 나라의 명목 GDP를 보면 우리나라는 13위이고 탄자니아는 83위이다. 경제적으로 부를 누리는 것과 사람다운 마음을 갖는 것은 비례하지 않는다. 잘 살고 못 사는 그것과 착하고 여유로운 인성을 갖는 그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경제적인 부는 이기적인 과욕을 불러오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는 점점 메말라 간다. 이 병원에서 인터뷰한 사람들이 탄자니아 국민을 대표하는 분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우리나라 국민도 탄자니아 사람들처럼 착하며 여유 있고, 이웃과 후손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수는 없을까? 의료 환경이나 경제적 상황이 우리보다 훨씬 어렵지만 현명한 이 사람들한테 배워야 할 것은 삶에 대한 저들의 지혜이다.

2025.08.01 於 鶴汝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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