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에 훌륭하신 의학계 선각자 다섯 분이 헌액되었다. 이번호에 그 중 105번째로 헌액되신 故 진병호 교수님의 공적을 기리며, 다섯 분의 대현(大賢)의 발자취를 한 분 한 분씩 찾아 연재하고자 한다.
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은 우리나라 의학발전의 기반이 되는 학회의 육성과 발전에 헌신하고 봉사한 분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8년 11월부터 운영해 오고 있다.
진 병 호서울의대 외과학교실
< 동물실험 중인 진병호 교수, 미네소타대학 교환 교수 시설로 추정(1956.2.14.), 일본 암학회에서.. 가운데가 진병호, 오른쪽으로 나건영, 신면우 >
故진병호 교수는 1932년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뒤 오가와 외과에 부수(조교)로 들어가‘교액성 장폐색증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한국인이 경성제대 교수직에 남을 수 없었던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해 평안북도 신의주에 진외과의원을 개업하게 된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면서 그는 개성으로 돌아와 경성제국대학 부속 생약연구소 연구원으로 연구에 매진했다. 이후 1949년 상경해 대한중석회사 부속병원 외과를 위임받아 성인외과병원을 개원했다가 1950년에 경찰병원 외과 과장직을 맡았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다시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그 뒤 서울의대 외과교수들이 모두 납북된 상황에서 진 교수가 외과를 이끌 적임자로 발탁되면서 서울대학교의과대학 외과학교실 주임교수를 맡게 됐다(1951년). 당시 외과에는 일반외과를 비롯해 흉부외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성형외과, 마취과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진 교수가 이를 단계적으로 분과시켜 후배 교수들이 각 과를 맡게 했는데, 이를 그의 제자들이 답습하면서 현재의 외과 체계를 갖게 된다.
1952년 그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의 제4대 원장에 취임했다. 당시는 전쟁 이후 미국해외활동본부(FOA)의 ‘미네소타 프로젝트’ 원조 계획이 체결되면서 병원은 물론이고 의대 및 타 단과대학에까지 지원이 이루어져 전후 복구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교수 충원, 조직 개편, 운영자금 마련 등을 총괄 지휘한 사람이 병원장인 진병호였다.
그는 국내 외과학계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1957년 국제외과학회 한국지부가 창설될 때 부회장으로 피선된 후 1958년 5-FU를 이용한 항암화학요법을 처음으로 시작했고, 대한암연구회(현 대한암학회)를 창설해 총무부장에 취임했다. 해당 학술대회에서 진 교수는 ‘억암물질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숙제보고를 해 암연구자로서 입지를 다졌다. 대한외과학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1953년~1954년) 외과학회지 창간에 기여했으며 1959년에는 대한외과학회 회장에 선임됐다. 미국 암학회에 참석한 뒤(1961년) 뉴욕의 슬로언 케터링 암연구소를 방문했고, 다음 해에는 대한민국 학술원이 주는 저작상을 수상했다. 1963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암연구소 초대 소장에 취임한 뒤 민간 암연구소인 중앙암연구소와 암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중앙병원을 설립하는 데에도 이바지했다(1964년). 이후 대한화학요법학회의 회장과(1964년), 국제외과학회 한국지부장에도 취임했다(1965년). 1966년부터 4년간 대한의학협회(현 대한의사협회) 학술이사 및 보건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같은 해 대한암협회 학술이사를 맡았고 제1회‘과학기술상’을 수상했다. 1968년 대한대장항문병학회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에 취임한 뒤 5년 동안 학회를 이끌었으며, 1972년 작고 직전까지 윤일선 회장을 모시고 암연구회 학술부장으로서의 역할을 이어나갔다.
故진병호 교수는 20년간의 130여 편의 논문을 남기는 등 교육에도 힘을 쏟아 우리나라 외과학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인 많은 후학들을 양성했다. 22년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주임교수로 지내면서 현대 외과의 틀을 선도적으로 수립해 외과 각 분과⋅분야 발전의 초석을 다졌고, 암연구와 암관련 학술단체, 지원단체 활동을 함으로써 ‘연구하는 외과의사’로서의 모습을 솔선하여 보여 주었다. 또한 대한외과학회, 대한암학회, 대한대장항문병학회 등 주요 학회의 창설과 발전에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는 오랜 기간 연구해 온 항암제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던 중 과로로 인해 유명을 달리했는데, 정부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동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