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일 호대한의학회 정책이사
첨단 의료기기 연구개발은 기술적 혁신뿐 아니라 실제 임상 현장에서의 사용 가능성과 안전성을 충족해야 성공할 수 있는 복합적 과정이다. 그러나 많은 연구개발 과제가 기술 중심으로 기획되면서 정작 현장의 임상적 필요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거나, 시장 진입 단계에서 임상적 근거 부족으로 실패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발 초기부터 임상 전문가가 참여하여 의료진의 실제 수요와 환자의 치료 목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기술 개발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범부처전주기의료기기연구개발사업단과 대한의학회는 2021년부터 임상학회 기반의 임상자문 플랫폼을 구축하여 운영해 왔다.
현재 의료기기 개발 과정에서는 시장 분석, 사용자의 니즈 분석, 규제 요구사항, UX 설계, 사업화 전략 등 다양한 요소들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한다. 기술 개발이 뛰어나더라도 임상적 유효성이 부족하거나 실제 사용 환경에 적합하지 않으면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 기술성숙도(TRL) 1~3단계에 해당하는 초기 연구 단계에서 미충족 의료수요를 명확히 파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개발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많은 기업과 연구자들은 이러한 초기 임상 분석 과정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추후 개발 단계에서 방향성을 잃거나 제품 전체를 다시 설계해야 하는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다.
2018년 FDA/NCATS의 희귀질환 의료기기 보고서에서도 91%의 임상의가 새로운 혹은 개선된 의료기기가 필요하다고 답변했으며, 3분의 2 이상은 아예 새로운 개념의 기기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러한 미충족 수요의 상당수는 수익성 부족, 높은 개발 비용 등을 이유로 실현 가능성이 낮다. 즉 실현 가능한 미충족 수요와 미래 기술이 만나 주목할 만한 혁신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임상 전문가와 개발자가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며, 대한의학회가 이 과정에서 중요한 매개 역할을 수행해 왔다.
임상학회 자문 플랫폼은 임상학회 자문, 건강가치탐색포럼, 임상학회 학술교류행사 등 세 가지 사업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지난 5년간 총 253개 과제에 대해 709회의 임상자문이 이루어지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175개 학회에서 총 720명의 자문위원이 참여하여 다양한 전문 분야의 의견을 반영하였고, 건강가치탐색포럼과 학술교류행사를 통해 기업과 학회 간 기술 교류의 장을 활성화하였다. 이 기간 동안 구축된 임상자문 체계는 우리나라 의료기기 R&D 역사에서 가장 체계적인 임상 전문가 네트워크의 기반이 되었다.
임상자문 플랫폼을 수행하면서 미충족 수요에 대한 체계적인 접근이 절실함을 확인하였고, 이를 위해 대한의학회의 임상학회 자문 플랫폼에서는 미충족 의료수요 기반 의료제품 설계서(Clinical unmet-based intended purpose establishment template(CLUE))를 개발하였다. 본 문서의 전반적인 맥락은 다음과 같다. 기업의 개발자가 Stage1에서 사용 목적에 대해 초안을 작성하면, 의료진이 참여하는 Stage2에서 임상적 문제 정의와 사용목적 설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다. 이후 기업은 자문 내용을 바탕으로 개발 방향을 재검토하고 Stage3에서 의사결정을 확정하며, 최종적으로 Stage4에서 명확한 사용목적과 적응증을 정의하게 된다. 이 과정은 반복적이며, 필요할 경우 Stage2과 Stage3을 다시 오가면서 임상적 가치와 기술적 타당성을 동시에 확보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는 개발자가 기술적 관점을 우선하는 기존 방식에서 벗어나, 먼저 해결해야 할 임상 현장의 문제를 정의하고 그에 적합한 기술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사고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많은 노력을 들여 개발한 미충족 의료수요 기반 의료제품 설계서는 2026년부터 범부처 후속사업의 필수 제출 문서가 될 예정이며, 과제 선정 평가부터 단계 평가, 최종 평가까지 전주기에 걸쳐 활용될 중요한 평가 도구이다. 이는 의료기기 개발 과정에서 임상적 사용목적이 얼마나 명확히 정의되었는지, 미충족 수요 해결에 실제로 기여하는 제품인지 등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으로 기능하다. 즉, 임상자문 플랫폼과 설계서 체계는 기술 중심 개발의 한계를 보완하는 구조적 장치로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2025년 구성된 자문 전문가 Pool에는 35개 학회 소속 293명의 전문가가 등록되어 있으며, 향후 신규 개발 분야에 맞추어 전문가를 최대 600명까지 확보할 계획이다. 또한 의학회는 단순히 자문을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기술 혁신 과정 전반에서 정책적·윤리적 책임을 갖는 중심 기관으로서의 역할 확대가 요구되고 있다. 의학회는 임상 기반의 과학적 질문을 제기하고, 정책·산업적 목표와의 조화를 고려하며, 임상적 임팩트를 중심으로 한 평가 체계를 구축하는 등 종합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향후 임상자문 플랫폼은 범부처사업단 과제뿐 아니라 민간기업, 대학 연구소, 병원 등 다양한 기관에서 수행되는 연구개발로 확장될 예정이다. 이를 통해 국가 의료기기 R&D 전반에서 임상 전문가의 접근성을 높이고, 개발 초기부터 시장 진입까지 임상적 관점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것이다. 나아가 이 플랫폼은 “임상에서 시장까지 이어지는 전주기적 개발 생태계”의 핵심 인프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된다.
결론적으로 지난 5년간의 임상자문 플랫폼 운영은 의료기기 연구개발 전 과정에서 임상 전문가의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임상의의 전문적 의견이 기술 개발에 반영될 때 제품의 실효성이 높아지고 시장 진입 가능성이 커지며, 궁극적으로 환자 치료의 질이 향상되는 선순환이 만들어진다. 대한의학회는 앞으로도 미충족 의료수요 발굴, 임상 기반 제품 설계, 단계별 평가 참여, 전문가 Pool 확대 등을 통해 국가 의료기기 R&D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 나갈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지속될 때 우리나라 의료기기 산업은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 환자 중심의 혁신 생태계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