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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78 January 2026

오피니언(1)

◎ 헬스 리터러시, 건강정보의 '정보 전달'을 넘어 '환자 활성화'로 나아가다

윤 정 희성균관대학교 삼성융합의과학원

헬스 리터러시가 의료계에서 다뤄진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지난 25년간 축적된 논의는 분명한 방향 전환을 보여준다. 초기 헬스 리터러시는 ‘환자가 건강 정보를 이해할 수 있는가’라는 개인의 능력 문제에서 출발했지만, 현재는 의료 시스템 자체의 표준과 책임, 그리고 질 관리의 일부로 재정의되고 있다. 다시 말해 헬스 리터러시는 더 이상 “환자가 얼마나 이해하느냐”를 묻는 개념이 아니다.

최근 국제 보건 정책의 흐름 역시 분명하다. 헬스 리터러시는 의료의 질과 환자 안전을 담보하는 핵심 기준으로 인식되며, 그 책임은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과 의료 시스템에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러한 전환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난 사례가 미국이다. 미국은 1999년부터 헬스 리터러시를 국민 건강 향상의 핵심 요소로 명시해 왔으며, Healthy People 2030에서는 개인의 이해 능력을 전제로 하기보다 조직이 개인의 헬스 리터러시를 공평하게 가능하게 하자는 구조적 접근의 국가적 목표(Organizational Health Literacy)로 설정하고 있다. 이는 곧 모든 조직이 건강 정보를 명확하고 이해 가능하게 제공할 책임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원칙은 선언에 그치지 않고 제도로 구현되었다. 오바마 정부 시절인 2010년에 제정된 Plain Writing Act는 모든 연방 기관 문서를 명확하고 간결한 언어로 작성하도록 의무화했으며, 이는 국민이 건강 정보를 접했을 때 별도의 해석 없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를 비롯한 정부 기관들은 Clear Communication Index(CCI)와 같은 표준화된 평가 도구를 활용해, 건강 정보가 실제로 이해되고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점검하고 있다.

영국 NHS England 역시 헬스 리터러시를 의료 서비스의 부속 요소가 아닌 핵심 구성 요소로 다루고 있다. NHS는 ‘정보 자체가 치료의 일부’라는 원칙 아래, NHS Digital Service Manual을 통해 디지털화된 NHS 서비스 전반에 적용되는 콘텐츠 작성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 2022년 7월에 공시된 Standard for Creating Health Content는 헬스 리터러시를 건강 형평성 해소와 직접적으로 연동시키며, 명확하고 사용하기 쉬운 정보 제공이 환자의 치료 참여를 확대하는 핵심 조건임을 내세웠다. 이 기준은 비영어권 이용자와 장애인을 포함한 소외 집단을 고려한 포괄적 콘텐츠 제작을 요구하며, 웹사이트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전반에서 모든 사용자가 접근 가능하도록 설계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호주에서는 헬스 리터러시가 보다 직접적으로 의료 안전 체계에 통합되어 있다. 헬스 리터러시는 국가 차원의 10개 필수 의료 안전 기준에 포함되어 병원 평가 지표로 활용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환자의 이해 부족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기관과 의료 전문가의 책임으로 명확히 위치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은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한국 역시 국민건강증진종합계획(HP2030)을 통해 건강 정보 이해 및 활용 능력 제고를 새로운 핵심 지표로 헬스 리터러시를 포함시키며, 건강 형평성 향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주기적인 모니터링 구축과 체계적인 건강 정보 제공 방안 마련 등 정책적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은 남는다. 특히 이 지표가 실제로 의료 현장의 책임으로 연결되고 있는, 의사 교육과 임상 진료 지침에 구조적으로 반영되고 있는지, 나아가 인증·평가·적정성 지표로 제도화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아직 명확한 답을 찾기 어렵다. 해외 사례와 비교할 때, 한국은 여전히 헬스 리터러시의 개념 도입 단계에 가깝다.

이 지점에서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의 전환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접근에서 벗어나, 환자가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고 치료 결정에 참여하도록 돕는 ‘환자 활성화(patient activation)’ 전략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환자 활성화’란 환자가 자신의 건강과 치료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스스로 선택하며, 일상 속에서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는 자기 효능감, 자율성, 자가관리 역량이 결합 된 상태를 의미한다.

환자 활성화를 헬스 리터러시 전략으로 활용한다는 것은 환자의 이해도를 점검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이해가 실제 건강 행동으로 이어지도록 설계하는 접근이다.

예를 들어 자기 효능감은 환자 활성화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단순한 격려가 아니라 과거의 성공 경험을 다시 불러오는 방식으로 강화된다. 환자 교육자료에 단순히 치료적 지시 항목을 적는 대신 “이전에 해보셨던 것 중에 잘 되었던 경험이 있었나요?”라는 질문을 통해, 이미 가지고 있는 역량을 인식하고 행동의 동기화를 만든다. 이와 함께 중요한 축은 환자 자율성이다. 많은 진료실에서 여전히 치료는 지시의 형태로 전달된다. “이렇게 하세요”라는 말은 효율적일 수 있으나, 환자의 참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반면 “A와 B 중 어떤 방식이 선생님의 생활 패턴에 더 맞을까요?”라는 질문은 치료를 하나의 선택 과정으로 전환시킨다. 이때 환자는 순응의 대상이 아니라 결정의 주체가 된다. 환자 활성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작동한다. 선택권이 주어질 때, 환자는 치료를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로 인식하게 된다.

국외 사례가 보여주듯, 헬스 리터러시는 이제 ‘의료의 질’과 ‘환자 안전’을 담보하는 거시적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의료기관과 학회 역시 헬스 리터러시를 임상 진료 지침 내 필수 권고사항으로 명확히 위치시키고, 이를 뒷받침할 표준화된 교육과 역량 강화 훈련을 더 견고히 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인증 평가나 적정성 평가 등 제도화 과정에서 헬스 리터러시 관련 핵심 지표를 발굴하고 주도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헬스 리터러시 향상은 이미 여러 국가에서 의료의 질과 안전을 담보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았으며, 더 이상 개인의 부담이 아닌 의료 시스템이 선제적으로 투자해야 할 보건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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