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 경 순천향의대 진단검사의학, 대한의학회 임상진료지침실행위원장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내가 습득한 의학 지식을 법에 의해 허락된 자에게 전하고,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환자에게 이익을 주고 해악을 행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때문에 의학분야에서는 현장 경험 혹은 연구를 통해 얻은 사실과 결과를 문헌의 형태로 정리하고 축적하기 위한 수 많은 의료인과 연구자의 노력이 모여 하나의 정설(定說)로 자리매김한다. 후학들은 이를 근거로 자신의 의료 전문성을 펼치며, 선행 근거를 비판 혹은 지지하는 근거를 추가하여 한때의 정설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화하고 이러한 과정이 바로 의학 발전의 역사를 이룬다. 근거기반의학과 임상진료지침은 바로 이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 출발한다고 필자는 해석한다. 현재 의료인이 임상진료에 참고할 수 있는 자료원은 교과서부터 논문, 온라인 지식 서비스까지 많고도 다양하다. 지금의 의료계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연구 논문과 NCCN과 같은 유수의 지침에 모두 언급되어 있다면, 지침을 주장의 배경으로 내세우는 것을 당연하고도 상식적 선택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임상진료지침을 왜 개발해야 하느냐, 스스로 족쇄를 채우는 행위를 왜 하느냐 등등 거부감을 표출하는 경우 또한 드물지 않다. 모순된 반응이지만, 이는 임상진료지침에 대한 부담감의 표현이라고 이해한다.
임상진료지침이 역사를 두고 생명력을 이어가는 것은 신뢰로부터 출발한다. 전문가들이 언급하는 유수의 해외 지침들은 오랜 기간 지침의 권고안을 의료현장에서 사용하면서 확보된 경험이 켜켜이 쌓여, 급기야 임상진료지침의 개발 과정을 상세히 모르는 상태에서도 상태에서도 무한 신뢰를 받는 위치까지 도달한 것들이다. 달리 표현하면 개발단체는 그 지침을 통해 그 학문 분야와 관련한 권위(權威, authority)를 확보한 것이고, 긴 세월을 둔 노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지금 새로 개발하는 지침은 신뢰를 쌓아 올릴 시간과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임상진료지침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신뢰”라는 단어는 상대방이 정직하고 진실하며 나를 해할 어떤 의도적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라 믿음을 의미한다. 임상진료지침의 핵심은 임상 진료에서 던져지는 질문에 대한 실행 가능한 권고를 주장하는 것이다. 즉 임상진료지침에서 주장하는 권고를 일선 의료인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신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신뢰는 획득하기 위한 다각도의 노력만이 가능하고 그 결실로 얻어지는 것이지, 신뢰하라고 주장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신뢰를 얻기 위해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일 텐데, 더 큰 어려운 문제는 우리 모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죄라는 성서의 표현도 있고,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정말 아는 것이 아니라는 고대 철학자들의 많은 언급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연구결과의 설득력이 높다고 모두 인정하는 무작위배정비교임상시험을 예로 한번 생각해보자. 논문을 작성하는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결과에서 비뚤림이 없음을 설득하기 위해, 연구대상군 선정, 배정, 맹검, 탈락, 자료 분석 과정 등 결과의 신뢰성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부분에 대한 서술을 논문에 포함하여 비뚤림이 없음을 독자에게 이해시키려 노력한다. 마찬가지로 임상진료지침도 개발그룹의 “권고안”이 치우침 없는 주장 임을 이해시키기 위해 관련 내용을 투명하게 내보여 지침 독자들을 설득해야 한다.
임상진료지침 신뢰 확보의 첫걸음은 투명성(transparency)이다. 임상진료지침의 투명성은 독자들에게 권고안 개발에는 누가 참여하였고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함을 의미한다.¹ 제공된 정보를 통해 지침 독자(사용자)는 권고하는 내용이 치우침의 위험이 충분하다고 판단할 수도 반대로 치우침의 위험을 최대한 피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체계적 문헌고찰의 작성을 PRISMA statement에 따르듯, 임상진료지침은 “The AGREE reporting Checklist”와 “A Reporting Tool for Practice Guidelines in Health Care: The RIGHT Statement”의 가이드를 따르도록 EQUATOR network은 제안한다.² 두 가이드 모두 “개발그룹”에 대하여, 개발그룹을 어떻게 선정했고, 어떤 역할을 수행했으며 주어진 책임은 무엇인지 서술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개발그룹에는 운영위원회, 권고안개발팀, 외부검토그룹, 근거리뷰팀, 방법론전문가와 같은 다양한 그룹이 그 범위에 포함된다. 지침 사용자들은 개발그룹에 관한 서술을 통해 지침의 범위와 목적에 비추어 그룹의 구성이 어느 한쪽 주장으로 일방적으로 치우칠 우려가 있는지, 길고 복잡한 개발 과정에서 정말 실질적 역할이 주어졌고 주장을 충분히 조율할 만한 개발구조인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여러 전문가 그룹의 임상진료지침 개발 과정을 조언할 때, 항상 마주하게 되는 어려움이 개발그룹 구성에서 신뢰성 있는 구조의 형성이다. 그룹구성에서 치우침 위험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인지하나 동시에 개발 진행과정에서의 어려움 또한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반대로 개발그룹 구성이 단순하면 근거의 합성이 끝남과 거의 동시에 “one shot one kill”로 권고안 합의까지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으므로, 일선 학회들은 합의과정의 어려움을 피하고자 개발그룹 구성을 최대한 단순화하기 위한 논리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강구한다.
누구나 신뢰 확보를 위한 최선의 목표를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구현 가능한 목표가 우리에겐 필요하다. 개발그룹 구성에서 지금 이 시점 우리나라 의학계는 얼마만큼의 목표에 도전해 볼 것인가? 대한의학회 임상진료지침실행위원회는 그 출발을 “임상질문(key clinical questions)”과 “지침이 목표하는 사용자(target users)”로부터 시작해 보고자 한다. 임상질문과 지침이 목표하는 사용자는 지침개발그룹이 스스로 제안하는 내용이다. 임상진료지침에서 목표사용자로 적시한다는 의미는 그저 한번 읽어보고 참고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목표사용자에게 필요한 질문이 있고 그들이 참고해야 하는 권고안을 그 지침이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만약 목표사용자로서 일차 진료의사와 간호사를 포함하였다면, 그들이 필요로 하는 임상질문은 누가 만들어야 하는가? 또한 그들에게 제시하는 권고안이 현장에서 실행 가능한지는 누가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목표사용자가 개발그룹에 참여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임상질문에 대해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위암의 진단과 치료에 대한 임상진료지침이라면, 예상컨데 임상질문으로 위암의 진단, 진행 단계별 치료 방침, 수술 적응증, 수술 후 케어, 항암화학요법, 방사선치료 등을 젊은 환자부터 임신한 여성, 노년의 환자군까지, 그리고 기저 질환을 갖는 군과 그렇지 않은 군 등으로 나누어 만들 것이다. 이런 구성은 외과계 혹은 내과계의 어느 분야에서 개발을 주도하더라도 대동소이할 것이고, 각각의 임상질문은 그 질문에 합당한 다양한 전문가그룹이 존재한다. 만약 임신한 여성 위암환자에 대한 질문의 권고안을 만들고자 한다면, 산부인과 전문가 그룹을 포함하여 그 질문에 대한 권고안 개발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질문에서 환자의 수술과 항암화학요법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는 다룬다면, 그 임상질문은 외과계와 내과계의 전문가 그룹이 함께 권고안 개발에 참여해야 함을 의미한다. 병리진단이나 영상진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신뢰할 만한 임상진료지침을 개발해 내는 것은 다양한 측면의 고통을 수반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시작이 반이라 했다. 시작하지 않고 실제로 임상진료지침을 통해 보여주지 않고 우리나라의 전문가 대표성을 말로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시작하고 임상진료지침을 통해 자신의 전문성을 보여주는 전문가 단체에게 그 분야의 권위는 부여될 것이라 믿는다.
1 IOM (Institute of Medicine). 2011. Clinical Practice Guidelines We Can Trust. Washington, DC: The National Academies Press. 2 EQUATOR network. http://www.equator-network.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