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도상국가들의 질병부담을 설명하는 소위 ‘이중 부담(double burden)' 이론이 있다. 영양불량이 만연한 개발도상국가에서는 높은 모성 및 영유아 사망률과 감염성 질환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영양 박탈을 경험한 채 생존한 아이들이 이후 경제개발과정에서 대사성 만성질환에 취약한 인구 세대로 남게 된다는 것이다. 생애 초기의 영양부족이 이후 전 생애를 걸쳐 오히려 영양 과잉과 관련된 질환의 유병률을 높이고, 따라서 개발도상국가들은 질병의 이중 부담을 갖게 된다는 이론이다.

북한은 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당시 최악의 영양학적 박탈을 경험한 국가이다. 따라서 이후 경제발전 과정에서 그 어떤 개발도상국보다도 대사질환과 같은 만성 질환에 취약할 가능성이 높다. 통일과정에서 북한 질병 구조의 변화를 예측해 볼 수 있는 몇가지 실증적 자료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나라에 정착한 북한이탈주민의 건강자료이다.

우리나라에는 현재 30,000여명에 달하는 북한이탈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은 통일 이후 북한주민의 건강 변화를 추정해볼 수 있는 시금석이다. 필자는 2008년 10월부터 North Korean Refugees IN South Korea (NORNS) 연구를 진행하며, 특별히 생활습관병을 중심으로 북한이탈주민의 건강 상태를 추적해오고 있다.

대사질환과 관련된 중요한 결과를 요약해보자면, 남한 입국 시 정상체중이었던 북한이탈주민 중 약 3/4이 체중이 증가하였으며, 남한 정착 후 8년 정도 지나면 남한 주민들과 비슷한 비만율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남한 입국 후 5% 이상 체중이 증가한 사람은 체중증가가 없었던 사람에 비해 대사증후군을 가질 확률이 10배까지 증가하였다.

특히 고난의 행군 당시 청소년기를 지낸 30대 남성의 경우, 복부비만 정도는 남한 사람에 비해 1/6 수준이었으나 대사증후군의 유병률은 이미 남한의 그것과 비슷했다. 또한 췌장의 인슐린분비기능이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이후 당뇨병 유병률의 급격한 증가를 예상하게 하였다.

당뇨병, 고지혈증, 고혈압, 대사증후군과 같은 대사성 질환을 흔히 빈곤과 풍요가 만나는 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사증후군과 당뇨병의 유병률은 이미 미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지난 30여년간 폭발적으로 증가해왔다. 한국인의 비만 정도가 미국의 그것에 비해 적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국인의 대사적 취약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에 대한 유력한 설명이 한국전쟁 이후 빈곤한 때 임신한 모성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영양결핍과 발육 장애가 이후 사회경제적으로 발전해 풍요의 때를 만나게 되면서, 대사성 질환의 발병을 증가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90년대 후반 우리보다 훨씬 심각한 영양 박탈을 경험한 북한이 이후 사회경제적 풍요를 경험하게 된다면, 생활습관병의 outbreak를 초래할 수 있다.

남북한 화해무드 속에 교류협력이 활발해질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앞으로도 몇 번의 곡절이 있겠지만 필자는 한반도 평화를 향한 물꼬는 이제 거스르기 어렵다고 예상한다. 과거 남북관계가 좋았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북한을 향한 적지 않은 인도적 지원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나마 지속되고 있는 인도적 지원의 성과들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한반도 건강공체라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남북한이 교류하며 협력하는 방식으로 보건의료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제 시대적 요청과 실제적인 unmet need에 주목하며, 남북한 서로의 장점으로 협력하며 상생의 결과를 창출할 수 있는 창의적인 컨텐츠를 준비해야 한다. 보건의료 교류협력 R&D와 관련된 몇 가지 사례를 생각해보자.

우리나라는 IT 강국으로 이미 수많은 원격진료 기술이 개발되어 있음에도 우리 의료에 적용하고 있지 못하다. 만일 북한에 우리 원격진료 기술이 적용되고 활용될 수 있다면 북한 주민의 건강 수준 향상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기술이 될 수 있다. 북한의 핸드폰 이용인구가 5백만을 넘어섰으므로 불가능한 얘기가 아니다. 원격진료 이외에도 북한처럼 당을 중심으로 조직화된 사회에서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인공지능 등 4차 산업혁명의 다양한 기술이 활용될 수 있다면, 짧은 시간 내에 남북한 건강 격차를 줄일 수 있는 좋은 모델들이 개발될 수 있을 것이다.

천연물 신약도 남북한 협력연구의 좋은 주제이다. Paclitaxel (Taxol), Exedin-4 (Exenatide), Phlorizin (SGLT2 inhibitor), 그리고 Artemisinin의 공통점은 천연물 신약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널리 사용하는 화학물 기반 신약들이 수입되지 못하는 북한 실정에서 천연물 신약에 집중하여 연구해온 것은 당연하다. 이미 북한에서 임상시험한 결과 인체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많은 천연물들이 있다. 이들을 잘 정제해서, 화학물의 구조, 약리성 특성 등을 규명하고 과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bedside to bench의 역순으로 약물개발에 나선다면 이 역시 중요한 남북한 교류협력 R&D의 성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는 전세계적 차원에서 매우 독특한 코호트이다. 유전적으로는 동일하나 70년 이상의 분단을 통해 달라진 환경적 여건이 질환의 발병 양상에 상당한 차이를 초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보건의료인들이 힘을 모아 질환의 발병 양상, 병인, 치료 등에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관리 전략을 함께 만들 수 있다면 전세계에 울림과 영향을 줄 수 있는 기념비적 결과들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