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수 현대한의사협회 국제이사
‘과학 없는 인문학은 맹목이고 인문학 없는 과학은 공허하다.’
에드워드 오 윌슨이 그의 저서 ‘통’에서 과학과 인문학에 서로가 필요함을 역설한 문장이다. 의학은 근거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철저히 과학적인 기반의 학문이라고 배운다. 그러나 기본이 되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없다면, 의학이야말로 가장 공허한 학문으로 전락해버릴 것이다. 결국 의학은 인간을 이해하고 삶의 과정을 탐구하는 인문학과 결코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의사가 되어가는 과정은 마치 단일 세포가 특정 조직으로 분화해 가는 과정과 닮았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미분화 세포가 결정을 거쳐 고유의 장기 세포가 되듯,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의대생은 졸업하고, 수련 과정을 거치며 한 명의 전문의가 된다. 그러나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반대로 그 외의 다른 가능성은 사라지고 시야가 좁아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전문가로서 깊어지는 깊이만큼, 인간 전체를 보는 시선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의사라는 직업은 과학적인 근거에 기반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역할에 국한된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삶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동일한 증상일지라도 다른 진단명이 붙여지고, 같은 진단명이라도 환자마다 선택하는 치료의 길은 다 다르다. 환자를 둘러싼 환경, 가족 구조, 개개인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그들이 적어 내려간 답은 매번 달라진다. 의사는 환자가 제출한 답안이 맞고 틀림을 판정하는 채점자가 아니다. 의사의 역할은 그들이 왜 그러한 답을 선택했는지, 그 삶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데 있다.
누군가의 첫 울음소리부터 누군가의 마지막 숨까지, 병원에는 인간의 다양한 생이 있다. 그리고 그 생의 선택을 마주할 때, 우리는 질병 너머의 그들을 둘러싼 삶과 가치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의사에게 인문학적 통찰이 필요한 궁극적인 이유가 아닐까.
그렇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의사가 펜을 든다. 환자를 만나고 병원에서 시간을 쌓아가는 동안 글을 쓴다. 병원의 일상을 기록하기도 하고, 환자가 내린 어려운 선택에 존중과 지지를 보내기도 하며, 때로는 사회가 쉽게 답하기 힘든 생명 윤리적 화두를 던지기도 한다. 이 모든 글쓰기의 본질은 결국 사람에 대한 이해이며, 이는 인문학의 근원과 그대로 닿아 있다.
우리나라 의사들 또한 격동의 역사 속에서 글을 통해 시대를 논하고, 세상의 난제에 대해 토의하고 답하기 위해 여러 문학 동호회를 만들어 왔다. 이번 43차 의협 학술대회에서는 의료계의 대표적 문학 활동을 조명하는 ‘의인문학전’이 처음으로 마련되었다. 현장에는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비치된 서적들을 통해 의사들의 글과 그 속에 담긴 시선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의인문학전에서는 한국의사시인회, 한국의사수필가협회, 의사수필동인 수석회, 박달회가 함께 소개되었다.
2012년 창립된 한국의사시인회는 진정한 의학은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에 근간을 둔다는 점에서 시와 닿아 있다는 취지 아래 시인 의사들의 교류를 이끌어왔다. 한국의사수필가협회는 의사와 환자, 의료계와 사회 간의 소통과 신뢰 구축을 도모하며 2008년에 출범하였고, 매년 ‘한국의학도수필공모전’을 통해 예비 의료인들의 인성 함양에 이바지하고 있다. 의사수필동인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수석회는 1965년 발족하여 해학과 덕담 속 시대를 논하며 첫 수필집 ‘물과 돌의 대화’를 시작으로 60년이 넘는 세월 동안 60여 권의 책을 발간하였다. 1973년 결성된 박달회는 의사로서의 삶과 희로애락을 담아내고자 시작된 동인으로, ‘박달나무처럼 단단하고 오래 지속되자’는 뜻에 걸맞게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50년 이상 수필집을 이어오고 있다.
선배 의사들이 수십 년간 펜을 놓지 않고 인문학적 고뇌를 이어온 것은, 그것이 단순한 교양이 아니라 정교한 과학적 사고 속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는 보루였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의료 현장은 과거보다 훨씬 복잡하고 가파르게 변하고 있다.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입, 첨단 기술과 인공지능의 도입, 급변하는 사회적 갈등과 생명 윤리적 난제까지. 의사들은 과거보다 훨씬 정답을 내리기 어려운 삶의 질문을 마주한다.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어떻게 치료할 것인가를 넘어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떤 삶이 가치 있는가’를 묻는 인문학적 통찰의 무게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선배들이 일구어 놓은 의인문학의 터전 위에서, 이제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의사와 의학도들이 펜을 들어야 할 때다. 질병을 넘어 인간의 본질을 바라보고, 기술의 발전 속에서 삶의 온기를 놓치지 않는 것. 이러한 인문학적 고민과 기록이 계속될 때, 의학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인간의 삶과 존엄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