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재 일
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장
공중보건의사 제도의 의의: 민간에 기대고 병역으로 버틴 공공의료
우리나라 의료체계는 오래된 역설 위에 서 있다.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는 민간 의료기관을 공적 보험체계 안으로 끌어들여 국민의 의료이용을 폭넓게 보장해 왔다. 그러나 국가는 이 성과에 기대어 충분한 공공의료 인프라를 구축하지 않았고, 민간 의료기관이 공공서비스의 상당 부분을 떠맡는 구조가 굳어지는 동안 공공의료체계는 방치되어 왔다.
그 한계는 농어촌과 도서 지역에서 먼저 드러났다. 시장성이 낮은 지역에는 민간 의료기관이 자리 잡기 어려웠고 이를 대신할 공공의료 기반도 충분하지 않았다. 이 공백을 메운 것이 바로 공중보건의사 제도였다. 국가는 지역 의료인력과 공공의료기관을 직접 확충하기보다 병역의무를 지닌 젊은 의사를 의료취약지에 배치하는 방식으로 지역의료 공백을 메워 왔다. 공중보건의사 제도는 단순한 병역 대체 제도가 아니라 국가가 충분히 구축하지 못한 지역 공공의료를 떠받쳐 온 핵심 버팀목이었다.
공중보건의사 제도의 위기: 수급 붕괴와 선택의 이탈
그러나 공중보건의사 제도는 지금 존립의 위기에 놓여 있다. 신규 의과 공중보건의사 수는 2010년대 초반 800명대에서 2026년 92명까지 줄었다. 지역 공공의료를 떠받쳐 온 제도가 필요한 인력을 충원받지 못하면서 제도 유지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국면에 들어선 것이다.
핵심은 의과대학생들의 선택이 빠르게 현역병 복무로 쏠리고 있다는 점이다. 36개월 복무가 가져오는 시간적 손실에 낮은 처우와 취약한 근무환경이 누적되면서 군의관과 공중보건의사의 복무 부담은 개인의 헌신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다. 여기에 선배와 동료의 현역 입대 경험이 쌓이면서 현역병 복무는 더 익숙하고 현실적인 선택지가 되었고 군의관과 공중보건의사를 당연한 복무 경로로 여기던 인식은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
수급 붕괴의 핵심 원인: 36개월 복무기간과 누적된 제도 방치
이처럼 제도 위기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과도하게 긴 복무기간이다. 군의관과 공중보건의사는 36개월 복무에 기초군사훈련까지 더하면 젊은 의사에게 3년이 넘는 공백으로 다가온다. 장기간의 교육과 수련이 이어지는 의료 직역에서 이는 병역의무를 넘어 경력 단절로 작용한다.
군의관과 공중보건의사의 복무기간은 제도 시행 이후 약 50년 동안 36개월에 머물러 있는 반면 현역병 복무기간은 병역부담 완화를 이유로 70여 년간 여러 차례 단축되어 육군 18개월, 해군 20개월, 공군 21개월이다. 같은 병역의무 안에서 이렇게 격차가 누적되면서 공중보건의사와 군의관 수급 붕괴는 가속되고 있다.
문제는 정부 대책이 여전히 공중보건의사 감소 이후의 공백 관리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순회진료, 원격협진, 보건진료전담공무원 활용은 모두 공급 감소 상황에서의 운영 대책일 뿐, 정작 젊은 의사들이 다시 이 제도를 선택하게 만들 복무기간, 신분, 처우, 법적 보호 차원의 개선은 충분히 다뤄지지 않고 있다. 긴 복무기간에 도서 지역의 고립감, 순회진료 부담, 폭언·폭행과 법적 분쟁에 대한 보호체계 부재가 겹치면서 지금의 수급 붕괴는 예고된 결과가 되었다.
공중보건의사 제도의 개선 과제: 복무기간 단축과 제도 정상화
해법의 출발점은 결국 복무기간 단축이다. 의료정책연구원의 '의과 공중보건의사 감소 대책 및 복무기간 단축 효과 분석' 보고서에서 복무기간이 24개월로 단축될 경우 의과대학생 응답자의 94.7%가 공중보건의사 복무를, 92.2%가 군의관 복무를 희망한다고 답했다. 수급 회복의 핵심이 어디에 있는지는 이미 자료로 확인되어 있다.
복무기간 단축은 특혜가 아니다. 형평성은 복무개월 수를 기계적으로 맞추는 문제가 아니며, 법무관 복무가 법조 경력으로 인정되는 것처럼 대체복무 제도는 각기 다른 목적과 복무 유인 구조를 가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일률적 형평성 논리가 아니라 제도 목적과 수급 현실에 맞춘 재설계이며, 무너지는 제도를 살리기 위한 결단이다.
복무기간 단축과 함께 제도 기반도 정상화해야 한다. 공중보건의사의 전문성과 책임에 맞게 전문임기제공무원으로서의 신분과 보수체계를 명확히 하고, 공무원 신분으로서 직무수행 중 발생하는 법적 분쟁에 대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 책임을 제도화해야 한다. 비연륙도와 지역 응급실처럼 단독 판단을 요구받는 현장에는 배후 의료진과 공중보건의사 간 원격 자문체계를 구축하고, 복무가 경력 단절로 남지 않도록 교육과 연수 기회도 적극적으로 보장해야 한다. 아울러 보건복지부장관 산하에 공중보건의사 단체와 지방의료원 등 현장 주체가 참여하는 심의·의결 기구를 두어 의료취약도와 진료수요, 대체 의료기관 접근성 등을 기준으로 공중보건의사 배치 적정성을 평가해야 한다.
맺으며: 지역의료 재설계의 출발점
공중보건의사 제도의 위기는 병역의무 인력의 헌신에 기대 방치해 온 지역의료 안전망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신호다. 초고령사회 진입, 의료자원의 수도권 집중, 지역사회 기반 돌봄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는 지금, 국가가 지역 공공의료를 어떤 방식으로 책임질 것인지 다시 물어야 하는 시점이다.
우리는 이 위기를 공공의료 재설계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의대 증원과 같이 민간 공급 확대에 다시 기대는 방식이 아닌 공공의료에 대한 국가의 책임 있는 제도 개선과 투자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공중보건의사 복무기간을 현실화하고, 전문성과 책임에 맞는 처우와 보호체계를 갖추며, 필요한 지역에 제대로 배치하는 구조로 바꿔야 한다. 지역 주민이 어디에 살든 필요한 의료를 만날 수 있도록 정부는 더 늦기 전에 결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