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성 존대한전공의협의회 회장
대한민국의 전공의들은 저마다 다양한 이유로 수련을 시작한다. 누군가는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꿈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는 특정 전공의 매력에 이끌려 그 과 수련의 길에 들어선다. 하지만 시작의 동기가 무엇이든, 수련에 임하는 젊은 의사들의 마음가짐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흔히 전공의의 고충을 주당 80시간이라는 근무 시간의 숫자로 표현하지만, 그 이면에는 방대한 업무량과 막중한 심적 부담감,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 단순한 노동 시간의 단축 논의를 넘어, 수련 시간 내에 양질의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이 진정한 문제다.
1958년 인턴 제도가 도입된 이래, 대한민국의 수련 시스템은 일방적인 의대증원 사태 거쳐 수련혁신지원사업이라는 이름의 유례없는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다.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고 인공지능이 의료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시대에, 차세대 의료를 책임질 의사 양성에는 완전히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의사가 충분한 임상 역량을 갖추는 것은 개인의 성취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 명의 숙련된 의사를 거쳐 갈 수많은 환자의 생명을 보호하고, 미래 세대에 의학적 가치를 전수하는 중대한 과정이다. 즉, 전공의 수련은 그 자체로 막대한 공익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사회의 모습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가게에서는 키오스크를 이용한 주문과 결제를 하고 있으며 x-ray 필름을 밤새 찾던 병원에서는 이제 환자 사진도 EMR 시스템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환자의 검사결과의 수치를 하나하나 외우기보다는 모바일을 이용해 조회하는게 더 빠르고 정확할 수도 있다. 이런 시대에는 수련의 모습도 달라져야한다. 기술적으로 멋진 가상현실 교육도 좋지만, 교육과 수련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일처리를 빠르게 하고 빠릿빠릿한 전공의를 길러내는 교육에서 환자와 소통할 수 있고 치료계획을 고민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연구를 기획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전공의 수련 과정이 필요하다.
과거 확장의 시대를 거치며 현대 의학은 끝없이 세분화되어왔다. 하지만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수련'은 이와 다른 특성을 지녀야 한다. 각 의사 개인 혹은 학회의 학문적 성취와 전공의가 임상 현장에서 갖춰야 할 실무적 자격은 결이 다를 수 있다. 전공의 수련의 최우선 목표는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실질적인 역할을 다하며 독립적인 전문가로 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전공의 수련 과정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느냐'를 따지는 구시대적 기준을 넘어, '무엇을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느냐'라는 본질적인 질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단순히 병원에서 4년이라는 시간을 노동으로 보낸다고 해서 전문의로서의 역량이 저절로 담보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각 연차별로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전공의에게 점진적으로 진료의 책임을 위임하는 시스템으로 진화해야 한다. 역량이 쌓일수록 책임은 증가하고 감독의 필요성은 감소하여,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을 때는 온전히 독립적인 진료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대한민국 의료의 질이 유지되고 환자의 안전을 굳건히 지킬 수 있다.
이러한 역량 중심의 수련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피드백이 필수적이며, 이를 이끄는 지도전문의의 역량 개발이 동반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교육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다. 여기서 보상이란 단순한 금전적 대가를 넘어,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후대에 전수하는 전문가의 헌신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제도적 지원을 의미한다. 전공의 수련이 지니는 국가적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명확해진 지금, 더 이상 개인의 선의와 희생에만 기대어서는 안 된다. 미래 의료를 지탱할 튼튼한 뿌리를 내리기 위해, 국가와 사회 차원의 확고한 제도적 뒷받침이 시급한 시점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역대급 반도체 호황으로 인해 생긴 대규모 추가세수를 미래대응기금이란 이름으로 만들었다. 정부는 미래, 청년, 지방, 교육 등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3대 분야에 집중 투자하기로 했다. 높은 수준의 대한민국 의료의 질을 유지하고 미래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전공의 수련 및 양성에 국가가 관심을 가지고 충분히 투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