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 지 태前 대한의학회 회장
인문학의 위기, 요즘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여기에 의료시스템의 붕괴라는 말도 함께 나오고 있다. 의학과 인문학, 이 두 분야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무너지는 게 이것만은 아닌 듯하다. 신뢰사회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인문학이라는 말의 네이버 사전적 의미는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쉽게 수긍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얼마 전 어떤 강좌에서 들었던 말을 생각해냈다. 알고 싶은 것을 네이버 녹색 창에 묻는 사람들을 '라떼'족이라 부르고 AI에게 물어보는 사람을 동시대 인물이라고 한다고 했다. 나도 AI에게 공손히 물어보았다.
대답은 이렇다. "간단히 말하면 인문학은 ‘사람과 인간 경험’을 주제로 삼아 그 의미와 가치를 탐구하는 학문 분야이다."
"다루는 주제는 문학, 철학, 역사, 언어학, 고전학, 종교·신학, 예술사, 문화학 등 인간의 사유·표현·문화적 산물을 중심으로 연구한다."
네이버도 인공지능도 명확히 의학이 인문학의 탐구 분야라고는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인문학의 본질은 인간의 행복과 존엄을 위해 존재하는 학문이란 점에서 의학과 추구하는 목적이 같고 함께해야 더욱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많은 의과대학에서 의료인문학이란 강좌가 늘어나고 있다. 이를 통해 의사의 윤리, 도덕 개념을 고양하고 봉사 정신을 함양해 보자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의학교육에 그런 분야를 더 한다고 교육 시간 대비 효과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하지 않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두 분야 다 서두에 말한 것처럼 무너지고 있는 분야이다. 무너지는 두 분야가 함께하면 시너지 효과를 내서 활성화될지, 폭싹 망할지는 알 수 없다.
유아원,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시절의 교육 과정에서는 오로지 의과대학 입학을 목표로 경쟁적으로 교육하고, 집안에서 하던 인성교육은 사라져 버린 사회에서 자라나 성인이 된 의과대학생과 의사들에게, 살면서 자연스레 몸에 배는 인문학적 소양을 요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끼기에 뒤늦게라도 이런 교육을 해보자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의학교육을 위한 많은 수업 시간에 인문학이 보태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를 행하는 데는 너무나 많은 장벽이 있다. 과중한 전공 수업에 새로운 수업을 부과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다른 과목을 줄이고 가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의사에게 인문학적 사고를 갖게 하려는 목적은 싸고, 빠르고, 고도의 기술과 지식이 동반된 진료에 따뜻한 인간성이 부여된 의료행위까지 할 수 있게 하고자 함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싸고, 빠른 진료는 가능하지만 교육에 많은 시간과 자금이 필요한 고도의 최신 기술과 지식을 포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여기에 삶을 통해 주변과의 관계에서 배양되는 인간적 따뜻함까지? 그게 현대 사회에서 가능한 일일까?
인문학적 소양은 배워서, 가르쳐서 되는 것보다는 주변의 환경으로 인해 자연스레 스며드는 쪽이라 생각하고 있는 필자는 지금 여기저기서 급히 서두르고 있는 주입식 인문학 의사 양성 교육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환자를 진료하는데 필요한 대화 방식, 태도, 겸손한 행위 등일 것이다. 그런데 환자를 진료하는 3분 안에 이를 실행하는 것은 공자, 맹자를 합쳐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런 것은 기술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가 필요한데, 우리 사회는 그것이 가능한 사회일까?
의사들에게 너희는 가운 입은 자이니, 무한한 책임감과 무한한 봉사 정신이 필요하다고 강요하는 사회인데, 의사의 가운은 작업복이지 법관이 입는 법복, 성직자가 입는 가운과는 의미가 다르다. 법관과 성직자가 입는 가운의 의미는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이라 그 옷을 입고 행한 일에 대해서 잘못되었다 하여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그러나 의사의 가운에는 그런 의미가 없어서 의료 행위에 사소한 잘못이 있어도 고소·고발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의학이 인간의 삶을 개선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학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은 인문학인데 이는 눈에 보이게 경제적 이득이 생기는 일도 아니다. 지성적 감수성을 장착한 의사가 사회에 배출될 때, 그들의 생각이 사회의 감수성과 함께 갈 때, 이것이 효과를 보이겠지만 사회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상처뿐이라면 의학과 인문학이 함께하려는 노력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우리는 인문학적 감수성을 갖춘 의사가 상처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갖추는 데 힘써야 할 것이지만, 그런 세상이 올 수는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낯 두껍고, 마음이 검은 자(厚顔心黑)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언제 멈춰질 것인가? 이런 세상에서는 인문학적 감수성은 스스로에게 독이 되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이 은퇴한 늙은 의사의 푸념이고 기우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