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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76 November 2025

기획특집

◎ 대한민국 의료감정의 체계와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의 역할

유 성 호대한의학회 법제이사

의료감정은 의학적 사실과 전문적 지식을 근거로 하여 법적 판단을 지원하는 공적 절차이다. 환자 진료가 현재의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면, 의료감정은 과거의 진료 행위를 재구성하여 사회적 정의 구현에 기여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의료감정은 의학과 법이 만나는 교차점에 있으며, 그 공정성과 전문성은 곧 사회적 신뢰와 직결된다. 이러한 신뢰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제도운영과 감정인의 책임 있는 참여가 필수적이다.

대한민국의 의료감정 체계
우리나라의 의료감정은 법원의 감정·자문 제도,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K-MEDI)의 감정,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KMA-MAC)의 감정, 그리고 한국소비자원의 감정 등 여러 기관을 통해 이루어진다.

법원의 감정·자문 제도는 재판부가 의학적 전문 지식이 필요한 사건에서 학식과 경험이 있는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하는 제도이다. 감정 의견은 판결의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지만, 법원은 그 의견에 구속되지 않으며 독립적으로 판단한다.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은 의료사고 피해자와 의료인 간의 분쟁을 신속하고 공정하게 해결하기 위한 준사법적 기관으로, 감정위원회를 구성하여 과실 여부와 인과관계를 심의한다. 한국소비자원은 소비자 피해 구제 절차의 일환으로 의료감정을 수행하며, 상대적으로 접근성이 높고 절차가 간결하다는 장점을 지닌다.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은 의료계 내부의 전문성과 공정성을 제도적으로 보장받은 공식 감정기관이다. 2016년에 설립된 이후 법원·검찰·경찰·보험회사 등 다양한 기관으로부터 감정을 의뢰받아 왔으며, 의학적 전문성에 근거한 객관적이고 표준화된 감정 체계를 구축하여 의료분쟁의 합리적 해결에 기여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의 역할과 절차
의료감정원은 법적 판단에 필요한 의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기관으로서, 객관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감정 업무를 수행한다. 감정 절차는 일정한 순서와 검증 단계를 거치며,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구조로 설계되어 있다.

먼저 법원이나 검찰, 경찰 등 의뢰기관에서 감정 신청이 접수되면, 의료감정원 사무처는 이를 서면으로 받아 전자 문서화하여 내부 프로그램에 등재한다. 최근에는 온라인 접수 시스템이 도입되어 의뢰 절차가 한층 간소화되었다.

이후 감정심의위원회가 해당 사건이 감정 대상과 범위에 적합한지를 검토한다. 감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그 사유를 명시하여 의뢰기관에 통보한다. 적합하다고 판정된 사건은 관련 전문학회에 배정되며, 사건의 성격과 복합성을 고려하여 두 개 이상의 학회에 감정을 의뢰하기도 한다.

감정료가 산정되면 의뢰기관에 통보되고, 납부가 확인된 후 감정이 개시된다. 배정된 학회는 의료감정 자료를 검토하여 감정서를 작성하며, 자료가 불충분할 경우 보정자료를 요청하거나 반송할 수 있다. 감정은 원칙적으로 3개월 이내에 완료되지만, 지연되는 경우 감정원이 해당 학회에 독촉을 실시한다.

학회에서 감정 결과를 회신하면, 의료감정원 내부의 심의위원회가 감정서의 타당성과 형식을 검토한 뒤 최종 결재를 진행한다. 필요시 재검토를 요청하기도 하며, 모든 절차가 완료되면 감정원 명의의 감정회신서가 의뢰기관으로 송부된다.

이와 같은 ‘의뢰–심의–배정–감정–검토–회신’의 구조는 감정의 객관성과 일관성을 담보하며, 각 단계에서 행정적 검증과 전문적 평가가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감정의 신뢰성과 제도적 과제
의료감정은 과학적 근거와 합리적 추론에 기반해야 하며, 그 과정이 투명하게 검증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기관 간, 전문가 간 감정 결과가 상이한 경우가 있어 사회적 불신이 초래되기도 한다.

최근 의료인들 사이에서는, 의료분쟁 재판에서 의료 측이 불합리한 결과를 받았다는 불신이 존재한다. 일부 의사들은 감정이 비전문가의 판단에 의해 왜곡되거나, 법원이 감정서를 형식적으로만 수용한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러한 불신은 의료감정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요인이며, 의료인들이 제도에 협조하기 어렵게 만드는 장애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감정 절차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과 더불어, 감정인의 전문성 표준화를 위한 교육이 필수적이다. 의료감정원은 감정인 교육을 제도화하고, 감정서의 구성 방식과 표현, 법적 의미에 대한 이해를 강화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감정인은 단순한 의학적 판단을 넘어 법적 사고와 증거의 논리를 이해해야 하며, 이를 통해 법원이 감정의 핵심을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도록 도울 수 있다.

나아가 의료감정원은 ‘감정 결과의 환류 체계’를 구축해, 법원 판결이 감정 의견과 어떻게 일치하거나 달랐는지를 감정인에게 피드백해야 한다. 이를 통해 감정인은 자신의 판단이 법적 판단 과정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학습하고, 감정 품질을 지속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는 의료인들이 “감정이 재판에서 왜곡되지 않았다”라는 신뢰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핵심 장치가 될 것이다.

또한 감정 관리 시스템의 통합 운영, 감정인의 법적 보호 강화, 인공지능(AI) 기반 감정 보조 도입 등도 감정의 객관성과 신뢰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감정인 익명제의 장단점과 개선 방향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은 감정인의 신원을 비공개로 유지하고, 감정부 명의로 감정서를 발행한다. 이는 감정인을 법적·심리적 압박으로부터 보호하고 독립적인 판단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이다. 실제로 감정인의 실명이 공개될 경우, 감정 결과에 불만을 가진 당사자가 소송이나 민원을 제기하는 사례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익명제는 책임성과 투명성 측면에서 한계를 지닌다. 감정 결과에 오류나 논란이 발생했을 때 개별 감정인의 판단 근거를 검증하기 어렵고, 감정인의 전문성과 이해 상충 여부를 외부에서 확인할 수 없다. 의료인의 직업윤리가 자기 책임의 원칙에 기반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완전한 익명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지적도 분명히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감정인의 보호와 책임이 균형을 이루는 형태의 ‘보호 실명제’를 고려할 수도 있다. 감정부 명의로 발행하되, 법원이나 수사기관에는 감정인의 신원을 필요할 경우 비공개로 제출하여 필요시 검증이 가능하도록 하고, 감정원 내부에는 감정인 등록·검증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관리하는 방식을 고려해 볼 수도 있다. 원칙적으로는 실명제 확대와 병행하여 향후에는 감정인의 법적 면책과 신변 보호가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감정과 사법 판단의 관계
법원은 감정인의 의견을 중요한 판단 근거로 활용하지만, 감정 결과에 구속되지는 않는다. 감정은 법관의 판단을 보조하는 전문적 참고 자료에 불과하며, 최종 판단의 주체는 법원이다.

법원은 감정의 전문성, 객관성, 논리적 일관성을 검토하고, 동일 사건의 다른 감정서와 비교·대조하여 증거가치를 평가한다. 감정의 전제 사실이 불명확하거나 근거가 모호한 경우 감정서의 증거력을 제한하며, 반대로 과학적 근거가 충분하고 진료기록과 부합할 경우 그 의견은 판결의 핵심 근거로 채택된다.

감정인 간 의견이 다를 경우, 법원은 추가 감정을 명하거나 제3의 감정기관에 재감정을 의뢰할 수 있다. 또한 감정인을 법정에 출석시켜 직접 설명을 들은 후 논리적 설득력과 전문성을 평가하기도 한다. 다만 판결문에는 채택되지 않은 감정의 배제 사유가 명시되어야 하며, 이러한 절차적 투명성이 사법 판단의 정당성을 높일 수 있다.

감정 간 불일치는 불신의 결과가 아니라, 법원과 전문가가 각자의 영역에서 진실에 접근하려는 숙고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의료감정은 의료와 법, 과학과 정의가 만나는 접점이다. 대한의사협회 의료감정원은 의학적 전문성과 사회적 책무성을 잇는 가교로서, 공정하고 투명한 감정 문화를 정착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감정의 표준화, 디지털화, 감정인 보호 제도의 확립, 그리고 사법 판단과의 협력 구조가 함께 발전해 나갈 때, 의료감정은 단순한 기술적 행위를 넘어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 제도로 자리 잡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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