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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67 January 2025

기획특집

◎ 초고령사회의 사회적 해법

장 덕 진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올해는 한국이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첫해이다. 초고령사회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를 말한다. 고령화의 정도만 놓고 보면 일본이 이미 2005년에 세계 최초로 초고령사회에 접어들었으니 우리보다 20년 앞서 경험한 바 있다. 고령화의 정도는 일본이 앞서 있지만 그 속도는 한국이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르다. 세계적으로 보면 모든 선진국이 고령화의 길을 가고 있기는 하지만, 유럽 국가들이 짧아도 50년 길면 100년에 걸쳐서 겪은 고령화를 우리는 단 20년 만에 겪어왔다. 그만큼 대비할 수 있는 시간도 부족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초고령사회가 되면 어떤 문제들이 생길지에 대해 많은 예측과 우려들이 있어 왔다. 몇 가지만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노인이 많고 젊은이가 적어진다는 것은 다른 말로 피부양 인구는 늘고 경제활동 인구는 줄어든다는 뜻이다. 복지지출은 크게 가족, 노동, 연금, 의료의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연금은 당연히 노인만 받는 것이고 사람이 평생 쓰는 의료비의 대부분은 사망 직전 몇 년에 걸쳐 쓰게 된다. 연금과 의료의 수요가 크게 늘어난다는 말인데, 그것을 뒷받침할 세금 내는 인구는 빠르게 줄고 있다. 재정의 커다란 어려움이 예상된다는 뜻이다. 학령인구 감소로 인해 학교가 문을 닫거나 통폐합되고 있다. 일본은 학령인구 감소와 동시에 대학 진학률 증가,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대학진학률 증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보다는 훨씬 쉽게 적응할 수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 사람들의 가치관도 변한다. 지난 40여 년간 전세계 사람들의 가치관 변화를 추적조사 해온 세계가치관조사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고령화의 진전과 더불어 부모에 대한 존경은 빠르게 줄어든다. 노인을 더 이상 존중해야 할 지혜로운 어른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익숙하고 당연하게 생각해온 정책들도 초고령사회에서는 그 의미가 달라져서,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정책조합이 전혀 오답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아베 정부 시절 일본의 복지정책 전문가들과 토론하는 자리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아베 총리의 소비세 인상 정책을 옹호하고 있었다. 소비세는 부자든 가난한 자든 똑같이 내는 세금이어서 대표적인 역진세이다. 한국이라면 당연히 소비세를 올리지 말고 부자들에게 과세하라는 비판이 이어졌을 것이다. 왜 역진세를 문제삼지 않느냐고 그들에게 묻자 돌아온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역진세와 누진세를 문제 삼는 것은 대부분의 인구가 경제활동인구일 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처럼 인구의 30%가 65세 이상인 사회에서는 일하지 않는 사람도 내는 세금이 정의로운 세금이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일하는 사람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세금 부담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세금은 당연히 역진세와 누진세로 나뉘는 것이고 그 둘 중에서는 누진세가 정의롭다는 상식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이처럼 초고령사회는 단순히 인구나 재정의 변화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처음 겪어보는 세상이 될 것이다. 이런 변화에 슬기롭게 대처해나가기 위해서는 유능한 정부와 합의의 정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둘 다 준비되어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고위 관료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고시라는 독특한 제도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는 매우 유능한 사람들이 관료가 되지만, 그들을 유능하게 일하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이 존재한다. 세계 여러 나라의 정부역량을 비교해보면 우리에게 특히 부족한 것은 정책의 일관성이다. 비록 최선이 아닌 차선의 정책이라 할지라도 10년, 20년의 기간 동안 꾸준하게 밀고 나가면 관련된 이해당사자들에게 일관된 시그널을 보내게 되고 그들은 정책이 유도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인센티브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한국처럼 극한대립의 정치 상황에서 정권교체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같은 집권당에서 정부만 바뀔 때에도 전임 정부의 정책은 완전히 사라진다. 균형발전, 녹색성장, 창조경제, 적폐청산 ... 무엇 하나 남은 것 없이 깨끗하게 잊혀지지 않았던가. 정책의 일관성이 없으면 이해당사자들은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머지않아 정책이 바뀔 날을 기다리며 버티게 된다. 중국에서 유행하는 말처럼 “위에 정책이 있으면 아래에는 대책이 있다”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작금 한남동과 여의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합의의 정치라는 말 자체를 꺼내기가 민망해진다. 정치인들의 성향과 역량도 문제이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사회적 배경이 있다. 초고령사회는 내리막의 사회이다. 경제활동인구가 빠르게 줄어들고 사회의 역동성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최근 한국의 GDP가 일본을 추월한 것은 일본이 우리보다 20년 앞서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것이 중요한 이유이다. 다른 말로 한국도 지금이 정점일 가능성이 많고, 고령화가 더 많이 진전되면서 다른 나라들에 추월당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리막 사회의 정치는 쉽게 포퓰리즘의 유혹에 빠진다. 어떻게 내리막길에서도 안전하게 운행할지는 제쳐두고 우리가 내리막에 선 것은 상대방 탓이라고 선동한다. 내리막 공포증을 악용하는 것이다. 이민자와 같은 약자를 비난하면 우파 포퓰리즘이고 부자들 탓이라고 선동하면 좌파 포퓰리즘이다. 주요 국가의 정치가 다 엉망이 된 상황이지만, 대체로 선진국은 트럼피즘 같은 우파 포퓰리즘 중남미는 핑크 타이드 같은 좌파 포퓰리즘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한국은 선진국이면서 좌파 포퓰리즘이 훨씬 강한 독특한 사례이다.

결국 우리가 처음 겪어보는 초고령사회를 어떻게 잘 운용해나갈 수 있을지 궁극적인 해법은 정치에 있다. 그런데 계엄선포와 줄탄핵에서 보듯이 정치가 스스로 자정 능력을 발휘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독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급하게 구색만 맞춰 타협했던 87년 체제가 그 효용을 다했기 때문이다. 어렵지만 다시 한번 시민의 역할을 바랄 수밖에 없다. 시민의 역할이란 거리에 나서서 양쪽으로 갈라져 싸우라는 뜻이 아니다. 투쟁의 민주주의가 아닌 당연한 일상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요구하고 그것을 구현하는 자를 민의의 대표자로 선출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만든 민주주의라는 제도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을 때, 초고령사회는 원만하게 굴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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