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성 구전임 대한의학회장 ·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최근 들어 임상 전문학회 또는 전문분야별로 충실한 임상진료지침들이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다. 비록 수용개발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나 개발된 진료지침의 수준은 이미 국제적인 수준에 이르고 있다. 아울러 수용개발이 결코 나쁜 방법이 아니라는 점도 다시 한 번 밝혀 둔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필자는 지난 10여 년간의 변화에 격세지감을 느끼며 후학들에게 감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낸다.
우리나라에서 임상진료지침의 개발은 정말 몇몇 학자들의 개인적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국내 의료계가 임상진료지침에 대하여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을 때 이미 선진 외국에서는 질병 진단과 치료에 있어서 임상진료지침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국내에서 임상진료지침의 개념을 정착시키고 개발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데 기폭제(trigger) 역할을 한 것은 대한의학회 이었다고 주저 없이 말하고 싶다. 벌써 10여년이 넘게 흘러간 옛일이지만 임상진료지침 도입의 초기에는 각 학회 대표들을 모아 교육시키고 참여를 권고하는 과정이 있었는데 그때 눈물을 흘려야 할 만큼의 오해와 우여곡절도 많았다.
뒤돌아 회고해 보면 세 가지 형태의 잊지 못할 사건들이 생각난다.
첫째 고비는 각 학회 대표자 회의에서 쏟아졌던 항의다. 의료보험 청구에 있어 삭감의 근거를 제공하는 짓을 왜 대한의학회가 나서서 하냐는 것이다. 임상진료지침에 대한 개념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진료행위의 통제를 위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는 매우 심각했다. 결국 질병의 진단과 치료과정에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데이터 분석에 의한 다양한 정도의 권고(recommendation)를 하는 것이 임상진료지침의 특징이고 장점이다. 사용여부의 선택은 의사 본인의 자율이라는 말로 설득을 시작했다. 그러나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마음을 뚫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진료지침의 사용 증례를 통해 본인들이 느끼게 하는 것이 최 상수였던 기억이 난다.
둘째로 봉착했던 문제는 임상진료지침의 경쟁적이고 무분별한 개발(난개발?)이었다. 임상진료지침의 중요성을 인식한 각 전문학회에서 임상진료지침의 개발이 여러 임상과 간의 공통된 진료 분야에 있어서 진료영역의 선점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각 학회별로 무분별하고 원칙이 흐트러진 임상진료지침을 개발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 나타났다. 많은 고민과 논의 끝에 착안한 것이 다학제적인 참여를 통한 임상진료지침의 개발이었다.
셋째 문제는 다학제적인 참여를 통한 임상진료지침의 개발 과정에서 나타난 각 전문학회의 독불장군 같은 권위주의였다. 일차진료 현장에서 필요한 임상진료지침의 개발에는 질병별로 적게는 3-4개에서 많게는 10여개의 전문학회가 참여하여야 제대로 된 진료지침을 개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각 전문학회는 워낙 권위가 있고 자존심이 강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 질병의 진료지침을 개발하는데 우리가 왜 저런 학회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일을 해야 하느냐?’ 하는 반발이 정말 거셌다. 참여가 필요한 학회가 다섯 곳이면 다섯 종류의 이유와 거부 의견을 보냈다. 그러나 그 모든 학회가 대한의학회 회원학회였기 때문에 설득이 가능 했고 때로는 강압적 참여 요구가 받아들여졌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권위가 높은 전문학회이기 때문에 다학제적인 개발에 꼭 참여하여야 신뢰를 유지할 수 있다. 전문학회는 권위만을 내세울게 아니라 의료계 전체와 사회적인 책임감도 인식할 줄 알아야 한다. 라고 설득했던 기억이 난다.
많은 역경과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대한의학회에서 처음 시도하였던 ‘다학제적 임상진료지침의 개발’이라는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대한의학회 임상진료지침 개발사업의 시발점에서 이유경 순천향대학교 교수, 조희숙 강원대학교 교수, 대한의학회 신인순 박사, 윤동섭 연세대학교 교수, 김재규 중앙대학교 교수님들이 많은 고생을 하셨다. 그 이후 대한의학회는 질병관리청(당시는 질병관리본부)의 특별한 관심과 후원으로 일차의료현장에서 필요한 다수의 임상진료지침을 개발하였다. 이 사업에 많은 전문학회의 전문가 대표들이 참여함으로서 효율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도 이런 훌륭한 임상진료지침 개발 사업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시작한 대한의학회의 임상진료지침 개발 사업은 이제는 여러 전문학회에서 스스로 개발한 임상진료지침을 대한의학회 임상진료지침 평가위원회에 자발적으로 의뢰하여 개발의 정당성, 적절성, 엄격성 등을 평가받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 필자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구구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지나간 무용담 같은 허망한 일에 연연하고자 함이 아니고 앞을 향한 발걸음이 간절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우리나라 임상진료지침 개발의 종주 단체로서 대한의학회는 좀 더 미래지향적인 식견을 갖고 활동을 하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욕심을 내 본다.
제4차 산업혁명시대의 변화가 워낙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서 오히려 그 속도감을 느끼지 못할 지경이다. 하루하루 변화되는 새로운 상황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 삶의 지혜가 되는 시대이다.
가정생활의 형태적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가 인공지능(AI)의 발달로 낯 설은 세상을 쉽게 만나고 있다. 특히 의료영역은 발전된 첨단 과학이 가장 먼저 적용되는 분야이기 때문에 변화의 속도가 현란할 지경이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화된 상황에 발 빠른 적응과 대책이 절실한 때이다.
제4차 산업혁명시대에 있어서 의료계에도 많은 변화가 예측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여러 변화 중에 필자는 새로운 임상진료지침의 필요성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여러 차례에 걸쳐 주장한바 있다. 다시 말해 AI의 진료 참여와 metaverse(cyberspace)라는 가상공간에서 의료관련 행위의 현실화 등은 곧 우리에게 닥쳐올 일이다.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진료현장은 얼마 안가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인공지능과 인간 의사가 협진을 통해 환자를 진료하는 공간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러면 그 시대에는 당연히 인공지능의사와 인간의사의 협진을 위한 새로운 임상진료지침이 반드시 필요하다. 다시 말해 앞으로 진료 참여가 필수적인 인공지능 의사라는 로봇의 참여 때문에 임상진료지침은 더욱더 중요시될 것이다.
물론 필자가 언급하고 있는 새로운 임상진료지침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많은 증례와 연구논문 등 상당한 문헌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미래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임상진료지침 개발에 선도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관심과 선제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러한 노력은 의료강국으로 나가는 원천적 지식을 축적하는 기반이 된다.
메타버스 가상세계에 빠져들면 몽상가로 추락할 수도 있지만 현실 세계에 대한 대반전의 계기를 찾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세계에 살고 있고 이를 극복해 위한 인식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의료강국 대한민국의 꿈은 여러 사람들의 힘과 관심이 응축되어야 이룰 수 있다.
2022. 09
於 鶴汝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