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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72 June 2025

학술대회특집(2)

◎ 기조강연: 비이커 속의 개구리 한국의료, 어떻게 살릴 것인가?
소통과 공감을 바탕으로 집단 지성 발휘해야

김 한 중前 연세대학교 총장

Ⅰ. 시작하는 말
‘토포필리아’는 고향처럼 특정 장소에 깊은 애정을 품는 감정을 말한다. 서울에서 태어나 살아온 나에게는 고향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없지만, 1968년 대학 입학 이후 40년 넘게 머문 캠퍼스의 ‘청송대’는 나의 토포필리아다. 처음엔 ‘푸를 청(靑)’ 자로 알았지만, 실제로는 ‘들을 청(聽)’ 자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 소리까지 듣는 곳이라 하여 백낙준 박사가 붙인 이름이다.

지금의 의료시스템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달리는 열차와 같다. 사태 초기만 해도 당사자 간의 대화와 협상을 통해 타협안이 도출되리라 기대했지만, 실상은 날 선 공방만 이어졌다. 정부는 2,000명 증원이 의료문제 해결의 전제라는 오판에 집착하며 강경 대응했고, 관료들은 여전히 권위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면 의사들과는 소통을 소홀히 했다. 의·정 간 구성된 의료 현안 협의체에서 사전 논의도 없이 정부가 의사 증원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여 신뢰가 무너졌다.

의료계 역시 책임을 피해 갈 수 없다. 의협 리더십의 부재와 혼란,전공의 및 의대생들의 침묵 투쟁, 잦은 주체 변경 등으로 일관된대응이 어려웠다. 특히 젊은 세대가 주도한 저항은 희생적이었지만사회와의 공감대를 형성하진 못했다. 의사 증원 반대 외에 사회에효과적으로 전달된 메시지도 부족했다.

이번 사태는 단순히 교육이나 수련의 공백을 넘어서, 의료계 안팎의 신뢰를 깊이 흔들었다. 학생과 전공의 교육의 직접 당사자인 학교와 병원은 주변으로 밀려났고, 사제간의 신뢰도 손상되었다. 오늘, 이 발표가 훼손된 신뢰를 회복하고, 뉴노멀 시대의 의료를 함께 설계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Ⅱ. 의료 개혁 정책의 허(虛)와 실(實)
1. 적정 의사 수에는 정답이 없다.
의료 현장에서는 의사 부족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의대2,000명 증원’은 과학적 근거 없이 추진되었다. 의사 수 추계는 여러 가정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며, 기술 발전과 인구 고령화 등 다양한 변수도 반영돼야 한다. 특히 AI 기술은 의사 수요를 줄일 수있다. 또한 진료 체계와 보상 구조에 따라 필요한 의사 수는 크게달라진다. 우리나라처럼 생산성이 높은 구조에서는 적은 의사 수로도 높은 접근성을 유지할 수 있다.

2. 의사 수 늘린다고 필수의료·지역의료가 살아나진 않는다.
정부는 필수의료와 지역의료의 문제를 단순히 ‘의사 부족’ 탓으로돌렸지만, 이는 잘못된 진단이다. 낙수효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생각은 시대착오적이며, 실질적인 원인에 맞춘 맞춤형 대책이 필요하다. 문제는 의사 수 자체가 아니라, 의사들이 필수의료와 지역의료를 기피하게 만드는 구조적 요인에 있다.

3. 의사들이 기피하는 것은 ‘필수의료’가 아니라 ‘불합리한 건보 체계’다.
필수의료는 고위험·고난도 진료와 응급진료를 포함하지만, 건강보험수가 통제와 과도한 책임 부담, 의료사고 위험성 등으로 기피 대상이 된다. 반면 낮은 위험과 높은 수익을 보장하는 비급여 진료는 더 매력적으로 여겨진다. 이는 의료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했던 젊은 의사들에게 좌절을 안기고 있다.

4. 지역의료의 핵심은 일차 의료 강화와 응급 이송 체계 확립
의료기관을 지역에 늘린다고 지역의료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건 취약 지역의 일차 의료 강화와 중증 응급환자 이송 체계구축이다. 과거 공중보건의, 지역 중심 의료 전달체계 등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아야 한다. 전국이 1일 생활권인 우리나라에서는 ‘거점 완결형’보다 환자 상태에 맞춘 ‘중앙-지역 협력형’ 시스템이 필요하다.

5. 대학병원은 한국 의료의 주춧돌이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대학병원은 교육·수련·진료의 중심축이며 세계적으로도 높은 평가를받고 있다. 그러나 과도한 환자 집중으로 의료전달체계가 약화되고,교육과 연구 기능이 희생되고 있다. 전공의의 과중한 업무, 교수의과도한 부담도 구조적인 문제다. 이들이 감당하지 못하면 의료시스템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6. 한국의료는 공공과 민간의 경계가 희미하다.
우리나라의 민간 의료기관은 건강보험 당연 지정제를 통해 공공기관과 동일한 기준으로 운영된다. 민간병원도 공익적 역할을 수행해왔으며, 오히려 더 치열한 생존 경쟁을 겪는다. 공공의료 확대는중요하지만, 왜 운영이 비효율적이고, 왜 소비자가 이용을 기피하는지 이유를 찾아야 한다. 또한 우리나라 의료기관은 모두 비영리 법인으로, 투자 회수가 불가능한 구조다. 의료에 대한 공공투자 여력이 없었을 때 정부는 민간 부문 투자를 유도했고, 여러 법적 제도를 통해서 공공성을 보장하고 있다.

Ⅲ. ‘비커 속 개구리’, 한국 의료
한국의 건강보험은 매우 짧은 기간 내에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제도로 완성되었지만, 그만큼 무리도 따랐다. 특히 관료주의가 제도설계와 운영에 깊이 개입하면서 의료기관은 건강보험 진료를 법적으로 강제 받게 되었고, 의사들은 국가의 수요 독점 구조 속에 놓였다.

그중 가장 민감한 사안은 ‘보험수가’다. 현재의 수가는 원가 이하수준으로, 젊은 의사들은 한국 의료를 ‘비커 속 개구리’처럼 서서히죽어가는 구조로 인식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일부만 가입한 상태라감내 가능했지만, 보험환자가 늘자, 병원들은 비급여 진료로 손실을보전해 왔다. 특진비, 병실 차액, 신 의료기술 등은 여기에 해당하며, 실손 보험의 보편화는 비급여 확대에 일조했다.

하지만 보장성 강화 정책으로 비급여 항목이 급여화되며 대학병원의 수익 기반은 축소되었고, 로봇 수술이나 건강검진만이 남았다.비급여 수요는 개원가로 집중되었고, 병원들은 '박리다매'식 진료량증가로 대응했지만, 이는 의료진의 과도한 노동을 초래했다. 검사나시술이 적은 과는 병원 내에서도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혼합진료 금지 정책은 병원들이 의존해 온 비급여보전 구조를 붕괴시킬 수 있다. 과거 헌법재판소는 당연지정제를합헌으로 판단하며 비급여를 통해 수익을 보전할 수 있다는 점을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비급여 축소는 결국 진료량 증가, 의료진과로로 이어진다.

지나치게 규제 중심의 정책은 또 다른 규제를 낳고, 젊은 의사들은정부가 설계한 '가두리 양식장' 같은 의료 시스템을 거부하고 있다.편법에 기대지 않고, 정당한 진료에 정당한 보수를 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생명을 살리는 본연의 직업적 사명을 통해 국민에게 신뢰받고 싶어 한다.

Ⅳ. 소통과 공감의 부재
2024년 2월 의대 정원 증원 발표 당시 정부는 의료계 반발을 과소평가했고, 전공의들도 금방 복귀할 것이라 예상했으나 이는 오판이었다. 2026년도 정원만 원점 회귀했을 뿐, 의정 간 신뢰는 더 악화되었고 갈등이 장기화된 배경에는 ‘소통’과 ‘공감’의 부재가 있다.

1. 정부: 일방적 정책 추진과 공감 결여
정부는 의료계와 사전 논의 없이 의대 정원 증원을 단행하고, 발표후에도 의료계와의 실질적 소통 없이 국민 홍보에만 집중했다. 언론과 일부 학자는 의사들을 ‘악마화’했고, 수련 현실이나 의료 현장의 어려움에 대한 공감은 없었다. 진정성 있는 호소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정책의 정당성만 반복 주장했다.

2. 의료계: 폐쇄적 소통과 감정적 대응
전공의와 의대생은 사직과 휴학 등 강경 투쟁만 반복했으며, 구체적 메시지 없이 SNS로 간헐적 소통을 시도해 국민과의 거리감만키웠다. 의협은 리더십이 불안정했고, 비대위들은 경쟁적으로 등장했다 사라졌다. 환자의 불안에 대한 공감 부족도 지적되며, 분노와폐쇄성, 소통 방식의 세대 차이가 의사들의 메시지를 왜곡시켰다.

3. 정당: 정쟁에 몰두한 정치권
여야 모두 정책적 논의보다 책임 공방에 치중했고, 갈등을 중재하기보단 정쟁의 소재로 이용했다. 청문회에서도 날 선 질문과 무성의한 답변만 오갔고, 여당은 의료계와 진지한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야당이 더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선 정황도 있었다.

4. 언론: 자극적 보도와 편향된 서사
언론은 초기에 의사 증원과 정부 정책을 지지하며 의사에 대한 혐오를 확산시켰고, 이후에는 입장을 바꾸며 의사들의 주장을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감정적 대결 구도를 조장했고, 젊은의사들의 불안과 고민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다. SNS와 유튜브 등대체 플랫폼이 더욱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그로 인해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도 생겨났다.

5. 환자와 시민사회: 침묵한 피해자들
환자들은 의료 공백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지만, 목소리를 내는데 소극적이었다. 시민단체와 환자단체도 중재자 역할을 하지 못했고, 갈등 양측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공감의 노력이 부족했다. 결론적으로, 갈등의 당사자 모두가 일방적 주장에 치우쳤고, 실질적인 대화는 실종되었다.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자 하는 공감이 결여된 채 정당화에만 집중하면서, 사회적 피로감과 불신만이 커졌다.

Ⅴ. 미래의료
의학 기술의 발전 방향은 ‘정밀 의료’와 ‘디지털 의료’로 분명히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의료제도와 정책은 예측하기 어려우며, 장기간의 의료사태를 경험한 지금 충격적인 변화도 배제할 수 없다. ‘뉴노멀’이란 기존 표준이 바뀌고 새로운 현실이 일상화된 상태를 뜻하며, 의료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의료계가 말하는 리셋은 희망적일 수 있지만, 실제 변화는 고통스럽고 적응은 쉽지 않다. 이제는 고성장 시대를 지나 저성장과 고령화, 의료비 증가에 대응해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과 비용 억제가 중심 과제가 될 것이다.

1. 건강보험을 대체할 민영보험의 가능성은 낮다.
건보 재정 위기가 민영보험으로의 전환을 촉진할 것이라는 전망은현실성이 낮다. 건강보험은 단기보험으로 수지 조정이 쉬우며, 과거위기도 빠르게 안정되었다. 실손보험은 과잉 보장과 도덕적 해이로문제를 일으켰으며, 향후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국민건강보험을 완전히 대체하는 민영보험의 등장은 사회적 수용성이 낮아 어렵고,일부 고급 진료 선택권 수준에 그칠 것이다.

2. 민간 중심의 의료 공급 구조는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은 공공의료 자원이 전체의 10%도 되지 않아 사실상 민간 중심이다. 이는 과거 국가 예산의 우선순위와 빠른 의료 수요 증가에 민간이 유연하게 대응한 결과이다. 하지만, 이 구조는 정부 규제를 받는 ‘비영리’ 병원이며, 공공 역할을 강제 받고 있다. 효율성과 경쟁력이 떨어지는 공공의료는 오히려 더 위축되고 있다. 꼭 필요하다면 지방 국립의대 신설보다는 특수 목적 의대를 특정 지역에 설립하는 등 현실적 대안이 필요하다.

3. 의료 자원은 줄이거나 최소한 더 늘리지 않을 것이다.
의료 자원(병상, 장비)은 이미 OECD 상위권이며, 과잉 공급은 의료비 증가의 원인이 된다. 과거에는 자원의 확충이 성장에 기여했지만, 인구 감소와 제로성장 시대에는 자원 축소 또는 동결이 뉴노멀이 될 것이다. 수도권 병상 억제 정책도 재개되었다. 이제 의료정책은 ‘성장’이 아닌 ‘관리’의 시대로 접어든다.

4. 진료비 지불제도의 변화가 의사에게 큰 도전이 될 것이다.
현재는 환자가 아닌 정부와 보험자가 진료비를 사전에 결정하는 전향적 지불 방식이 보편화되었다. ‘행위별 수가제’에서 ‘포괄수가제’ 나 ‘가치 기반 수가제’, ‘관리의료(managed care)’ 등으로 점차 바뀌고 있으며, 이는 의료비 억제 정책으로 추진될 것이다. 의료계는 이 같은 변화 흐름에 주체적으로 대응하고, 제도 설계와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5. 의사들은 새로운 성장의 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국종 교수의 조언처럼, 성장이 가능한 분야로 나아가는 자세가필요하다. MZ세대 전공의들은 성취와 자기 성장을 중시하며, 수련과정이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다른 길을 모색할 것이다. 의대생과 전공의는 지적 우수성이 입증된 집단으로, 의사뿐만 아니라 창업가, 연구자, 정책가, 글로벌 전문가로의 확장 가능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미래는 의사 역할의 다변화를 요구한다.

Ⅵ. 맺는 글
1년 4개월간 이어진 의·정 갈등은 단순한 정책 다툼을 넘어 의료체계 전반에 깊은 상흔을 남겼고, 갈등이 끝난 후에도 의사 공급 공백 등 현실적인 후유증이 지속될 것이다. 변화는 불가피하며, 의료인과 환자 모두 다시 적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후유증은 각 집단 간의 신뢰 붕괴다.

이제 우리는 집단 지성을 통해 의료의 미래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집단 지성은 다양한 집단이 서로의 경험과 데이터를 바탕으로 협력해 창의적이고 지속 가능한 해법을 도출해 내는 힘이다. 인터넷 기술은 이러한 협업의 가능성을 더욱 넓혀주고 있다.
의·정 갈등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 건강, 의료 인력의미래, 재정의 지속 가능성 등 복합적 요소가 얽힌 구조적 문제다. 의료 현장의 생생한 경험과 의사들의 전문 지식은 현실적인 대안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만, 제대로 소통되지 않으면 ‘집단 이기주의’ 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정부, 국회, 의료계, 시민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동등하게 참여해 문제의 본질을 함께 직시하고, 해법을 공동 설계하는 집단 지성 기반의 협의체가 필요하다.

단, 의사들을 단순히 들러리로 세우는 방식은 갈등을 반복하게 만든다. 의료 현장의 중심에 있는 의사들의 목소리는 정책 논의의 주체(captain)로 존중되어야 한다.
미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성장이 둔화되는 뉴 노멀 시대, 공공성과 자율성, 첨단기술과 인간성이 조화를 이루는 의료 시스템이 절실하다. 진정한 소통과 공감을 바탕으로, 우리는 갈등 해소를 넘어 의료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 가야한다.

대한의학회(https://www.kam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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