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상 준 외과전문의
외국 학회에 참석하여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이상하게 배가 고픕니다. 동료들과 우르르 식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습니다. 웨이터가 건네준 메뉴판을 살펴보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즐겁게 식사하러 왔을 뿐인데 마음이 100% 즐겁지 않은 것입니다. 메뉴판의 음식 리스트가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어 메뉴판이 있는 레스토랑은 그나마 약간 낫습니다만, 독일어 메뉴판, 일본어 메뉴판을 만나게 되면 그야말로 로제타스톤을 앞에 가져다 놓고 해석하라고 요구받는 참담한 심정이 됩니다.
착석 3분 후, 멀리서 담당 웨이터가 다가옵니다. 다들 고개만 푹 숙이고 있습니다. 물론 웨이터는 우리에게 한 번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What would you like to drink?” 맥주나 와인 한 잔을 주문하고 얼른 첫 번째 위기를 넘깁니다만, 약 5분의 시간이 흐른 후 웨이터는 주문했던 맥주나 와인을 가지고 오면서 음식 주문을 받습니다. 메뉴판 내용이 쉽게 해석되지 않아 먹고 싶은 것을 고를 수 없는 우리는 매번 “Would you recommend the most delicious food in this restaurant?”라는 문장을 반복해서 말하곤 합니다. 그 나라의 대표 음식이 있는 식당이면 좀 낫습니다. 독일에서 “슈바인학세”, 체코에서는 “꼴레뇨”라고 주문하면 됩니다. 그런데 3끼 정도 돼지족발을 먹다 보면 슬슬 혀가 얼얼해집니다.
사람은 누구나 편식을 합니다. 편식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별로라, 부드러운 말로 바꾸어 표현하자면 사람은 누구나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삽니다. 한국에서도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사는데, 외국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먹지 못하면 학회건 여행이건 뭔가 아쉽기만 합니다.
2010년 즈음 이탈리아에서였습니다. 파스타를 먹으러 들어간 레스토랑, 저는 이탈리아어로 적혀 있는 파스타 메뉴판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맥주 한 잔을 주문하며 일차 위기를 넘긴 후 맥주를 가져온 웨이터에게 “Spaghetti with Olive oil, please.”라고 주문하였습니다. 웨이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Are you sure?”라고 물었고, OK라고 대답한 제 앞에 나온 파스타는 다른 식재료는 아무것도 없는 올리브기름에 버무린 스파게티 면이 전부였습니다. 귀국해서 파스타 책 몇 권을 사서 읽었습니다. 알고 보면 별것도 아닙니다. 파스타 이름 앞쪽은 면 이름, 뒤는 소스 이름일 뿐입니다. 외우기 전문가들인 의사들이므로 면 이름 10개, 소스 이름 10개만 외우는 것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중간의 a, alle, a la 같은 단어는 전치사이므로 무시해도 됩니다. 이젠 이탈리아에 가서 이탈리아어를 몰라도 파스타를 자유롭게 주문해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 이후 이탈리아에 못 가본 것입니다.
혹시 일본에 가서 야끼도리(꼬치구이)집에 가서 아무거나 먹고 나온 경험 한 두 번 있지 않나요? 마찬가지로, 해부학의 달인인 우리들은 닭의 해부학 부위 이름 몇 개만 외우면 야끼도리집에서 아주 편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저는 일본어를 거의 모르지만 우니(성개), 마구로(참치) 등등 스시의 일본어 이름 20개 정도는 외우고 다니기 때문에 일본 초밥집에서 편하게 주문해 먹을 정도는 됩니다. 지난 12월 일본에 방문해 보니 대한민국 수능이 끝난 후라, 일본에 처음 온 티 팍팍 나는 한국 수험생들이 제법 동경 거리에 보였습니다. 동경 신주쿠의 어느 초밥집에 들어갔을 때 옆자리에 앉은 3명의 수험생들이 열심히 구글 번역기를 돌려 가며 주문을 하는데 애처롭기 그지없었습니다. 오지랖 넓게 “너네 먹고 싶은 거 뭔데?”라고 하며 주문을 도와주고 설명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 사람이 우리나라 분식집에 와서 김밥/쫄면/오뎅/순대 등등 몇 가지 음식 이름만 알고 있으면 편하게 주문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정말 별 것도 아닙니다. 그냥 이름 몇 개 외우고 있으면 OK입니다.
사실 외과의사는 영양(nutrition) 분야에 관심이 많습니다. 다른 과 환자와 달리, 배를 열고 수술 받은 환자는 한동안 음식을 자유롭게 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입원해 있는 환자야 정맥을 통해 주사로 영양 공급이 가능하지만, 수술 후 집에 있는 환자는 스스로 먹어야 합니다. 어떤 환자는 정상 체력을 회복하는 데 1년 정도 걸립니다. “왜 못 먹지?”를 고민하다 보니 환자 뿐 아니라 사람들은 몸에 좋은 음식보다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산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게 제가 음식을 공부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음식을 공부하다 보니 음식 문화에 대해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영양-음식-문화로 이어지는 공부를 하다 보니 환자에게도 조언할 수 있는 지식이 쌓이게 되었고, 저 역시 외국에 가서 즐겁게 음식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음식과 문화를 공부하는 가장 쉬운 핑계는 “메뉴판 읽기”입니다. 메뉴판을 읽을 수 있으면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고, 원하는 음식을 주문할 수 있으면 학회나 여행이 2배 이상 즐거워집니다. 그것 역시 소확행으로 삼기 충분한 아이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