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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E-NEWSLETTER No.79 NOVEMBER 2017

ISSN 2287-9390 (Online)

대한의학회(Korean Academy of Medical Sciences). The enhancement of medical specialties through education, research and training

Academic Medicine의 확립을 위하여

Academic Medicine 확립하여 의사사회 위상 재정립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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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좌 섭
서울의대 의학교육학

Academic medicine(이하 AM)의 우리말 용어는 아직 마땅한 것이 없다. 흔히 쓰이지 않는 탓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중대하다. AM은 교육, 연구, 진료라는 세 가지 미션을 통합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의학의 발전을 이끌고 의료계와 사회의 관계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 의료계가 국민건강을 위해 나름 열심히 일하면서도 국가와 사회로부터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AM의 부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AM의 보루는 교육, 연구, 진료의 통합적 미션을 추구하는 의과대학, 교육병원, 그리고 각종 학회들이다. 이에 근접한 조직으로는 41개 의과대학의 협회, 학회들의 연합체인 의학회(교육병원의 별도 조직은 없다)가 있으나 AM을 대표할 실체적 단일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의학교육의 역사를 쓴 Ludmerer에 따르면 미국에서 AM의 개념이 등장한 것은 19세기말이다. Ludmerer는 18-19세기의 미국의학을 Practical Medicine(이하 PM)이라고 부르는데, 19세기말경 의학지식의 팽창과 과학적 의학의 대두로 의학을 학문으로서 교육하고 연구하고 진료하는 새로운 분파인 AM이 등장한 것이다. 미국의학사를 보면 19세기말 미국의료계에선 돌팔이가 판을 쳤다. 의사양성소의 교육환경은 ‘터키탕이나 이발소’보다 나을 것이 없었고, 교육과정 2년 간 같은 강의를 두 번 반복하는 곳도 있었으며 등록금만 내면 백지졸업장을 주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AM의 등장은 큰 파문이었다. AM의 분파는 대학에서 전일제로 일하면서 진료 외에도 교육과 연구를 수행했고 아카데미즘과 프로페셔널리즘을 앞세웠다.

새로이 등장한 AM은 당연히 세속적인 PM과 충돌, 대립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의료시장에서 동종요법(homeopathy) 등과 경쟁하는 PM은 시장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AM과의 연대가 필요했고, AM 역시 PM 없이는 자신들의 힘이 미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AM과 PM은 때로 대립하고 때로 협력하면서 상호발전을 도모하는 관계를 정립했다. AM은 PM과의 관계에서 끌어안기를 통해 주도권을 확보하는 한편 PM을 프로페셔널리즘과 과학으로 압박하면서 정부, 국민과의 관계에서 과학적 의학의 신뢰를 획득했으며, PM은 AM의 리더십에 협력하면서 시장에서의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

이 같은 미국식 발전경로가 모든 나라에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에 비추어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중요한 시사점이 도출된다. 우리나라 초창기 근대의학의 기수격인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는 일본 제국주의, 미군정의 일방적 보호 아래 성장했기 때문에 전통의학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민간의 PM 역시 경쟁자인 대체의학과 한의학을 일제가 일방적으로 말살하는 ‘온상(溫床)’에서 성장하여 AM과 상호의존적인 연합관계가 형성될 기회가 없었다. AM과 PM의 연합을 압박할만한 외부적인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M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배출한 곳이 AM이고, PM은 AM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이었다. 때문에 양자는 1980년대까지 비교적 바람직한 분업과 협력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대기업들이 병원과 의대를 설립하면서 사정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대기업 병원과 신설의대들은 전통적인 AM의 역할보다는 시장에서의 승리를 목표로 했고 PM의 입장에서 상대하기 힘겨운 경쟁자가 되었다. 이 같은 변화는 사립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전통적인 사고틀을 갖고 있던 국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신설 병원 및 의대와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국립의대, 국립대병원들도 진료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강화하고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교육-연구-진료라는 AM 본연의 삼각균형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AM의 미래를 담보하기 위해서는 아래 다섯 가지 과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첫째, 교육-연구-진료 3중의 사명을 갖고 있는 AM 본연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전통적인 비유에 의하면 AM은 ‘다리를 3개 가진 등받이 없는 의자(tripod stool)’로 표현된다. 교육-연구-진료를 상징하는 3개의 다리 길이가 다르면 넘어진다는 것이다.

둘째, PM과의 관계가 새로이 정립되어야 한다. 2000년 의약분업 사태를 계기로 의료계 내부의 협력, 연합의 필요성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AM은 PM을 이끌만한 정치력을 갖고 있지 못하고 AM 내부에는 PM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다. 특히 AM이 진료에 중심을 둠으로써 PM과 시장에서 경쟁관계에 놓인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양자의 상호협력을 위해서는 먼저 서로의 요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소통의 장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또 하나 고려할 사항은 과연 AM만 아카데미즘을 추구하면 되는가 하는 의문이다. 필자가 알고 있는 개원가의 몇몇 의사들은 대학병원 교수들 못지않게, 때로는 그 이상으로 ‘무시 당해가면서’ 국제학회에 참석하는 등 아카데미즘을 추구하고 있다.

셋째, AM 단체 간의 협력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AM의 리더십으로 의료의 질, 프로페셔널리즘을 강화하고 대정부, 대국민 관계를 새로 정립하여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데에는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그러나 이 같은 변화를 어떻게 이루어내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경로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현재로서는 AM의 가장 중요한 미션이라고 할 수 있는 교육영역에서 체계구축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 같다. 예를 들어, 대학에서의 기본의학교육과 병원에서의 전공의교육, 연수교육을 하나의 축에 놓고, 역량중심으로 연속 설계하는 등 구체적인 실천과제를 중심에 놓고 협력에 착수하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된다.

넷째, 국민, 사회와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AM이든 PM이든 의료계 자체가 ‘진료실 밖의 세상으로 넓게 열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의료계는 그 동안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린 일에는 목소리를 높여왔지만, 사회적 현안에는 침묵하는 자폐적 태도를 견지해왔다. 최근 세월호 참사나 가습기 살균제 사태 등 의학적 전문성, 의료적 개입이 필요한 상황, 그리고 의료계의 문제점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의료현장의 중대한 사건사고들 사이에서 침묵을 지키는 자세를 유지하면서 사회·국민과의 관계를 재정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섯째, 정부정책에의 참여와 영향력이 강화되어야 한다. 정부정책이 의료계 전반의 생존환경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할 때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을 확보하지 않고는 AM으로서도 PM과의 관계에서 동반자적 리더십을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최근 들어 AM을 실체적으로 확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막다른 골목에 몰린 한국 의료계의 현실 때문일 것이다. 너무 늦은 것 같기는 하지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적절한 때’라는 말을 떠올려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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