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 승 준대한의학회 부회장
많은 학회가 제주도에서 국제 학술대회를 열고 싶어 한다. 대규모 참가자를 수용할 컨벤션 인프라를 갖춘 몇 안 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준비를 시작하면 “제주도에서 열면 제약사가 후원할 수 없다”라는 답이 돌아온다. 특정 리조트나 호텔이 문제가 아니라, ‘제주도’라는 지역 자체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 국제 기준 ‘IFPMA’다. 과연 그럴까. 필자는 그 원문을 직접 확인해 보았다.
IFPMA란 무엇인가— 누구를 규율하는 규범인가
IFPMA(국제제약협회연맹)는 전 세계 제약회사들이 스스로 지키기로 합의한 윤리 자율규약(Code of Practice)이다. 여기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이 규약이 누구를 규율하는가’이다. IFPMA 규약 원문은 그 적용 대상을 명시적으로‘회원 제약사(member companies)’로 한정한다. 즉 IFPMA는 제약회사의 행동을 규율하는 규범이지, 학회(학술단체)의 행동을 규율하는 규범이 아니다. 이 구분은 사소해 보이지만 결정적이다. 학회가 ‘어디에서’ 학술대회를 열지는 애초에 IFPMA의 규율 대상이 아니다. IFPMA가 규율하는 것은 오직 ‘제약사가 그 행사를 어떻게 지원하는가’뿐이다.
IFPMA는 실제로 뭐라고 쓰여 있나
장소에 관한 핵심 조항(제7.1.4조)은 이렇게 되어 있다. “모든 행사는 학술·교육 목적에 부합하는 적절한 장소에서 열려야 하며, 회사는 유명하거나(renowned) 호화로운(extravagant) 장소를 피해야 한다.”
여기서 금지되는 것은 ‘지역’이 아니라 ‘장소의 성격’이다. 오락·유흥·사치의 이미지가 두드러진 장소를 피하라는 것이지, 특정 도시나 섬을 통째로 봉쇄하라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IFPMA가 2023년에 발표한 후원 지침(Note for Guidance)은 한 걸음 더 들어간다. 설령 어떤 장소가 오락·레저로 유명하더라도, 제약사가 ‘그 행사가 학술·교육 모임에 여전히 적합하다’는 점을 입증·문서화할 수 있다면 후원을 진행할 수 있다고 명시한 것이다. 다시 말해 IFPMA에는 특정 지역을 무조건 금지하는 규정이 아예 없다. 오히려 ‘개별 행사의 실질을 따져보라’고 요구한다.
하객에게 당부하는 규범으로 결혼식장 장소를 금지하는 격
IFPMA를 결혼식에 빗대어 보자. 학회는 결혼식을 여는 혼주이고, 제약사는 초대받아 축의금을 내는 하객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IFPMA는 “하객은 지나치게 값비싼 선물을 들고 오거나 결혼식을 술판으로 만들지 말라”라고 하객에게 당부하는 규범이다.
그런데 “혼주가 제주도에서 결혼식을 올리면 하객은 참석도, 축의금도 내지 말라”라고 한다면 어떨까? 이는 하객이 지켜야 할 당부를 ‘혼주가 예식 장소를 정하는 자유’에까지 끌어다 붙인 것이다. 하객을 향한 규범은 본래 혼주의 장소 선택을 막을 힘이 없다.
실제로 우리나라 제약사의 학술대회 지원은 대부분 ‘학회에 대한 기부금·부스료’ 형태로 이루어진다. 의사 개인의 항공·숙박·식사를 제약사가 직접 대는 구조가 아니다. 이는 IFPMA가 말하는 ‘제3 자 주최 행사(Third-Party Event) 지원’에 정확히 해당하며, IFPMA가 가장 우려하는‘개인에 대한 부당한 접대’ 요소가 처음부터 거의 없는 구조다.
그렇다면 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KRPIA)의 설명은 무엇이었나
정리하면, IFPMA는 물론 이를 준용하는 유럽(EFPIA)·미국(PhRMA) 어디에도 “제주도 등 특정 지역에서 열리는 학회는 지원 불가”라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국제 학술대회들 중 다수가 미국 라스베가스, 올랜도, 스페인 해안 도시 등 대표적 휴양지에서 매년 열리고, 세계 유수의 제약사들이 이를 후원한다. 그런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제주도’라는 지역 자체가 막힌다면, 그 근거는 최소한 IFPMA는 아니다.
만약 KRPIA가 국제 기준보다 더 엄격한 내부 컴플라이언스(CP)를 두고자 한다면, 그 자체는 협회의 자유다. 국제 규약은 어디까지나 ‘최소 기준’이고, 회원사가 더 엄격한 자체 기준을 채택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IFPMA 때문에 안 된다”라고 설명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 협회의 정책적 판단”이라고 밝혀야 한다. 근거를 국제 기준에 전가하는 순간, 학술단체는 존재하지도 않는 규정을 전제로 잘못된 의사결정을 강요받게 되기 때문이다. 국제 기준의 이름을 빌려 지역 금지를 정당화해 온 것은 아닌지, 설명을 들어온 학술단체로서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KRPIA는 어떻게 바꿔야 하나
첫째, ‘지역 일률 금지’에서 ‘행사 실질 심사’로 전환해야 한다. 관광·오락 프로그램이 결합되어 있는지, 개인 접대가 있는지, 관광 성수기를 피했는지 등 IFPMA 지침이 이미 제시한 실질 기준으로 심사하면 충분하다.
둘째, IFPMA 후원 지침이 권고하는 방식— 즉 기부금이 오락·레저가 아닌 학술·교육에만 쓰이도록 계약서에 명시하고, 예산 내역에서 오락성 항목을 분리(carve-out) 하는 방식— 을 채택하면, 장소가 제주도라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맺음말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먼저, 제도 개선을 제안할 수 있다. 마침 새 공정경쟁규약이 2026년 7월 1일 시행되었고, KRPIA와 공정거래위원회의 협약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전환기다. 지금이야말로 ‘지역 일률 금지’가 아니라 ‘행사 실질 심사’ 기준으로의 개정을 하기에 적절한 시점이며, 대한의학회는 KRPIA 측에 이에 대한 제안을 이미 하였다. 아울러 형평성의 문제도 함께 지적할 필요가 있다. 외국에서는 해외 유명 휴양도시에서 열리는 국제학회는 후원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제주도만은 안 된다는 이중잣대는 합리적으로 설명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IFPMA의 본래 취지는 부당한 접대를 막자는 것이지 특정 지역을 봉쇄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규정의 문구가 아니라 그 취지다. 그리고 그 문구를 원문으로 직접 확인해 본 결과, '국제 기준'은 어디에서도 제주도를 막고 있지 않았다. 그동안 제주도의 문을 닫아 온 것은 국제 기준이 아니라, 그 기준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적용이었다.
참고
IFPMA Code of Practice(2019), 제7.1.4조 및 적용 대상(Scope) 조항/ IFPMA Note for Guidance on Sponsorship of Events and Meetings(2023). 본문의 조항 해석은 IFPMA 공식 원문을 근거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