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희 원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의사들이 하라는 대로 해야지, 의사들이 하는 대로 따라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다. 의사들이 가진 지식과 전문성은 사람들이 건강을 지키고 질병을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정작 의사들의 생활습관은 타의 귀감이 되지 못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담배를 끊지 않는 호흡기 내과 의사, 폭음을 하는 간 전문 소화기 내과 의사처럼, 해당 분야를 전공하면 나쁜 생활습관을 유지하더라도 스스로는 질병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종의 면책 특권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분들이 많다. 의사들은 고된 의과대학 학부 과정과 수련 과정을 통해서 스트레스와 과로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노화를 가속시키고 만성 질환을 부르는 좋지 않은 생활습관에 익숙해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근면과 성실, 불굴의 의지를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사회 문화 속에서, 최소한의 잠과 휴식을 챙기려는 노력은 게으르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폄훼되는 경우마저 있는데, 필자가 수련의로 일하던 15년 전만 하더라도 밤을 새워 폭음을 한 후 새벽에 수술을 집도하는 것이 훌륭한 의사의 의지력(?)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노화 속도나 수명에 큰 영향을 주는 자기 돌봄의 요소들로 수면, 식사, 신체 활동, 음주, 흡연, 스트레스, 긍정적인 사고방식, 건강한 사람들과의 관계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요인들이 전반적으로 건강한지의 여부는 중년을 기준으로 20년 이상의 수명 차이를 만들어 낸다. 후성유전체 바이오마커를 이용한 연구들에서는 이와 같은 요소들이 명확한 노화 속도의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이는데, 노화과학 가설(geroscience hypothesis)에서는 이런 생활습관 요인의 누적이 노화 속도에 영향을 주고, 장기적으로 수명뿐만 아니라 노화 연관 질환, 신체 기능, 인지 기능 등에 모두 결정적임을 역설한다. 안타깝게도, 충성스러운 바이탈과 의사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대부분 포기해야 하는 요인들이다. 그 결과는 어떨까? 2016년, 이대목동병원 가정의학과 전혜진 교수의 연구에서 의사가 일반인보다 암 유병률이 3배 정도 높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고, 지난 2000년, 대한의사협회의 의뢰를 받아 실시한 연세의대 유승흠 교수는 의사의 평균 수명이 일반인에 비해 짧다는 결과를 내놓은 적도 있다.
내과 전공의 2년차 4월달, 어느날 아침에 경험했던 일이다. 당시에는 전공의 80시간 근무 제한 규정이 없었으므로, 1년차 시절에는 매주 3-4회의 병동 당직이 일상적이었다. 시간이 부족해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울 때가 많았고, 아침 식사는 거의 매일이 캔커피였다. 실질적으로 영양 결핍 상태였지만, 점차 배는 나오고 근육은 빠졌다. 그래도 20대 중반, 아직 몸의 ‘무료 구독 기간’이 남아 있었기에 체중 변화는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1년간 내과 전공의 생활을 경험하고 난 뒤였다. 파견병원의 지하 1층 강당에서 컨퍼런스를 듣던 중 CPR 방송이 났다. 내과 병동은 고층에 위치했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가 없어 계단을 냅다 달리기 시작했는데, 불과 4층에 이르기도 전에 숨이 너무 차서 더 뛸 수가 없었다. 의대 시절에는 매일 6~8km를 뛰던 몸이었다.
렌틸콩 통조림을 점심으로 먹기 시작한 것이 이 때부터다. 달리기를 다시 시작하고, 근력 운동을 배웠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교수님들이 주로 이용하는 병원 헬스장에 가기 시작했다. 불과 6개월 후에 하프마라톤에 나가 흡족한 성적을 냈다. 그런데, 과연 의사의 자기돌봄은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될 일일까?
긴 근무 시간, 높은 스트레스, 수면 박탈은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 축에 악영향을 주어 대사적으로는 쿠싱 증후군과 비슷한 표현형을 만든다. 배는 볼록 튀어나오고 팔다리는 가늘어진 모습이다. 기능영상(fMRI)를 이용한 연구들은 수면부족이 몸에 해로운 음식에 대한 선호도를 증가시키고, 전두엽 기능 저하로 자제력을 떨어뜨림을 보인다. 스트레스, 수면부족과 생활습관의 악화, 이로 인한 대사 표현형의 악화는 다시 폐쇄성 무호흡 등 수면의 질을 떨어뜨리는 악순환을 만든다. 한편, 수면 부족과 스트레스 호르몬 축의 과활성화는 의사결정능력을 비롯한 인지기능에도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하룻밤을 꼬박 새거나, 2주간 매일 1시간씩 수면박탈을 초래하게 되면 대략 혈중알코올 농도 0.08%, 즉 소주 한 병을 빠르게 마신 정도의 인지기능 상태가 된다. 당연히, 자기 관리의 문제를 넘어서서 환자에게 제공하는 의료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수 있으며, 심각한 경우 의료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문제는 단순히 가정이 아니라 실제로 큰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미국의 리비 지온(Libby Zion) 사건은 의사들의 과로와 그로 인한 환자 안전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다. Zion은 18세에 병원에 입원하여 사망했는데, 우울증으로 평소 MAO 억제제를 복용하던 상태에서 메페리딘이 투여 되어 세로토닌 증후군이 생긴 것이 직접적 사인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진료에 참여한 수련의들이 과로와 피로로 인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한 것이 원인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 이후 미국에서는 레지던트 의사들의 근무 시간을 제한하고,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는 법안이 마련되었다. 2011년 미국 ACGME 규정에서, 1년차 전공의는 최대 연속 16시간 이하의 근무를, 2년차 이상의 경우 연속 24시간 이하 근무를 해야 한다. 또한, 인지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여러 전략(예, 전략적 낮잠 자기)을 권고한다. 의사는 생명을 다루는 임상적 의사 결정을 수행한다. 잘 알려진 비슷한 사례로, 항공기 조종사의 건강관리와 연속 근무에 관련한 규정을 참고할 만하다. 국내 규정에 따르면, 2인의 조종사가 근무하는 경우 최대 연속 승무시간은 8시간, 연속 7일간의 최대 근무시간은 60시간이다.
그러나, 아직 국내에서는 수련 과정에서 36시간 연속근무가 당연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리비 지온의 아버지 시드니 지온은 뉴욕 타임즈에 “당신이 36시간 연속근무를 한 사람이 정상적으로 의사 결정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유치원도 다니지 않아도 당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고 기고한 것과 비교하면, 아직까지 의료진의 자기 돌봄과 인지기능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에 있어서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30년 이상 뒤쳐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현재 한국의 의료 환경에서는 의사들이 자기 돌봄을 실천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특히 생명을 다루는 필수 의료 영역에서는 저수가와 왜곡된 자원 배분 문제로 인해 의사들이 충분한 휴식과 자기 관리를 하기 어렵다. 이는 의료의 질을 떨어뜨리고, 의사들의 건강에도 큰 부담을 준다. 혹자는 단순히 의사 수가 부족해 이런 문제가 생긴다고도 하지만, 문제의 원인을 살펴 들어가면, 결국에는 의료 시스템 내에서의 자원 배분 문제, 우리 사회의 워라밸을 바라보는 마인드셋, 일종의 폰지 구조가 되어 버린 상급종합병원의 커리어 시스템 등 여러 가지가 얽히어 있다.
2024년, 의대 정원 문제로 시작된 여러 일들이 의료계를 뒤흔들고 있다. 그동안 켜켜이 쌓인 수많은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함부로 놓쳐서는 안되는 귀중한 기회다. 의사의 자기 돌봄은 개인의 건강을 넘어 국민의 건강, 환자의 생명과 의료 시스템의 안전 전반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의료 시스템은 의사의 젊음과 건강을 착취하며 아슬아슬하게 굴러갔던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몸과 마음, 생활습관이 모두 건강한 의사를 만들 수 있는 의료 시스템으로 어떻게 변모해갈 지를 고민하기에 더없이 좋은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