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옥 주서울의대 인문의학
대한의사협회는 지난 4월 16일 의협회관 대강당에서 '대한의사협회(KMA) 글로벌 포럼'을 열었다. 2023년 4월 고려의대 박정율 교수가 2년 임기의 세계의사회(WMA) 의장으로 선출되어 4월 18∼20일 서울에서 열린 WMA 이사회의 사전행사였다. WMA는 114개국의 1500만명의 의사들을 대표하는 국제기구이다. 1947년 창설 초기부터 전 세계 의사들을 위한 보편적인 국제 윤리 지침을 수립하는 책임을 맡아왔다. 1948년 제네바에서 개최된 WMA 제2차 총회에서는 고대로부터의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현대적인 언어로 재구성한 “제네바 선언”을 채택했고, 1949년 WMA 제3차 총회에서는 위원회의 준비를 거쳐 ‘국제의료윤리강령(International Code of Medical Ethics, ICoME)을 채택했다. 1964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제18회 총회에서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의학 연구에서의 윤리적 원칙'인 헬싱키선언을 국제의학연구윤리 지침으로 채택했다.
이번 포럼 첫 세션인 <의료윤리의 글로벌 이슈>에서 2024년 10월 개정 예정인 헬싱키선언과 2022년 10월 개정된 'ICoME'의 내용이 소개되었다. 전 세계의 의사들은 어느 지역에서 진료를 하거나 의학 연구를 하더라도 각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헬싱키선언과 'ICoME'에 제시된 글로벌 의료윤리에 따라 의업을 실천해야 함이 강조되었다. 이 발표들에 이어 필자에게 주어진 연제의 제목은 <아시아의 관점에서 본 의료윤리(Medical ethics: Asian perspective)>였다. 이 주제는 글로벌 의료윤리 지침을 만들어나가는 WMA에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 의료계에서도 풍부한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아시아는 세계 영토의 30%를 차지하며, 2024년에는 약 47억 8천 5백만 명으로 전 세계 인구의 약 60%에 해당한다. 인더스 문명과 황하 문명 등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으며, 이들 문명은 고대로부터 전통의학을 발전시켜 왔다. 아시아는 불교, 기독교, 유교, 힌두교, 이슬람교, 도교 등 많은 종교의 발상지이고 이들 사상은 아시아에서 의료윤리 전통을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차라카 사미타'는 기원전 1천년 경의 산스크리트어 아유르베다 텍스트로 의사들의 윤리 강령을 제시한 인류사의 초기 문헌 중 하나이다. 환자로부터의 동의를 얻는 것, 의사의 윤리와 전문성에 대해 다룬다. 당나라 의사인 손사막(孫思邈)은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에서 '대의정성(大醫精誠)'을 다루는데, 의사는 개인적 욕망을 완전히 제거하고 환자에게 동정심과 공감을 보여야 한다는 의료윤리를 강조했다.
아시아의 현대화 과정은 문화, 가치, 윤리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서양 의학의 도입은 아시아의 전통적인 가치와 마주치면서 새로운 의료윤리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헸다. 아시아의 생명의료윤리는 아시아의 풍부한 문화와 철학적 유산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후반 서양 학자들에 의해 자율성존중, 선행, 해악금지, 정의와 같은 생명의료윤리 원칙들이 공통 도덕의 보편적 원칙으로 제시되었지만, 유구한 윤리적 전통을 지닌 아시아에서는 이러한 원칙들이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적용되었다.
아시아의 유교 문화에서 인(仁)으로 표현되는 자비와 동정은 서양 의료윤리에서의 선행의 원칙을 넘어선다. 맹자는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보고 견딜 수 없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자비와 동정심은 인류의 출발점이며, 도덕적 의무 이상이며, 인간의 본성이다. “의술(醫術)은 인술(仁術)”이라는 표현은 동아시아 의료윤리에서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의사들은 치료할 뿐만 아니라 환자에게 동정심과 공감을 보여야 한다.
또한, 아시아의 아힘사(अहिंसा, ahimsa)는 서구 의료윤리의 해악금지의 원칙을 뛰어넘는 보편성을 지닌다. 불교와 힌두교 전통에서의 아힘사는 비폭력과 생명에 대한 존경을 의미하며, 이는 모든 생명체에게 확장되는 것이다. 이 원칙은 인간과 비인간 개체의 조화로운 공존을 강조하는 도교의 자연 개념과도 연결되어 있다.
동아시아에서 의(義)는 올바른 일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일을 올바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땅히 해야 할 바(oughtness)”를 의미하는 아시아의 의(義)는 서양 의료윤리에서 말하는 공정성으로서의 정의(justice)와는 다르다. 의(義)와 이익(利)은 대립하는 개념이다. 의(義)는 또한 애국심이나 효도 등 고귀한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의지를 나타내기도 한다. 따라서 의(義)로운 의사들은 개인의 이익에 관계없이 병든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아시아의 윤리에는 불교와 힌두교의 다르마(धरम, dharma)가 있는데 다르마는 "올바른 삶의 패턴"을 의미하며 의무의 원칙을 나타낸다. 의사의 다르마는 자비롭게 환자를 돌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잘 돌보고 좋은 생활 양식을 유지하며 병이 나면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의사와 협력해야 하는 다르마가 있다.
서양에서의 독립적인 개인의 개별적인 자율성과는 달리, 아시아인들은 사람들의 상호의존성을 인정하는 관계적 자율성에 의존한다. 아시아 문화에서, 가족은 사회 중심적 자아의 도덕적이고 존재론적 실체이다. 관계적 자율성은 아시아인들이 우리의 내재적 상호의존성을 인정하는 원칙으로, 아시아의 가족, 공동체 또는 더 큰 자아가 개인보다 더 큰 무게를 지니는 것을 반영한다.
한국의 의료에서 가족 중심 접근법은 중요한 특성의 하나이다. 이는 출산, 임종 치료와 사망, 그리고 생체 및 사망 후 장기 기증 등 다양한 주요 분야에서 볼 수 있다. 장기 기증에 대한 결정은 기증자보다 가족의 동의를 우선시하며, 생체 간 이식에서 기증자는 주로 16세 이상의 자녀들이며, 생체 간이식을 받는 사람들은 오륙십대의 아버지가 가장 많다. 보조 생식 기술에 대한 배우자의 동의 필요성과 가족 가치에 대한 강한 강조는 한국의 가족 중심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사회적 논의를 거쳐 한국의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등에 반영되어 근거를 갖추게 되었다.
한국의 가족 중심 접근법은 아시아의 중요한 관점인 공동체적 가치를 통하여 개인들의 삶을 더욱 번영하게 할 수 있다. 반면, 여러 문제들이 제기될 수도 있다. 기증자의 의사보다 가족의 동의를 우선시하면, 기증자 개인의 의사를 충분히 존중하지 못할 수 있다. 또한 자녀들은 부모를 위해 생체 기증자가 되도록 가족 구성원들로부터 강한 영향이나 압박을 받을 수 있다. 보조 생식 기술은 성(性), 생식, 임신을 분리하여 다양한 형태의 부모가 될 수 있게 하지만, 전통적인 가족을 강조하는 한국의 법은 이러한 실천을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의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환자의 생명유지치료 결정법에 따르면, 연명의료 결정에서는 환자 자신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2017년 이 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연명의료 결정은 개인의 자율성보다는 자녀들이나 배우자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동법 시행 이후, 개인의 연명의료 결정을 미리 해 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 가족 중심의 접근법이 강조되었던 한국의 의료윤리는 사회의 변화에 따라 계속 진화하고 있다.
기술 중심의 의학과 사회의 변화, 글로벌화의 영향, 다원적 가치, 그리고 변화하는 가족 구조는 전통적인 가족 중심의 의사결정에 도전을 제기한다. 가족을 독립적인 도덕적 권위로 받아들이는 것과 개인을 자율적인 주체로 인식하는 것 사이에 긴장이 증가함에 따라, 삶에서 자기실현과 도덕적 진실성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것에 도전이 있다. 아시아의 인문학, 윤리, 의학, 의료윤리의 오랜 역사와 함께, 아시아 학자들은 생명윤리 원칙의 맥락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전통적인 가치와 현대 의료 실천의 요구 사항을 조화시킴으로써, 외국에서 수입된 것을 토착화하여 문화적으로 수용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아시아의 전통에서 발전된 귀중한 가치들은 보편적인 글로벌 의료윤리의 원칙을 더욱 풍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WMA International Code of Medical Ethics : https://www.wma.net/policies-post/wma-international-code-of-medical-eth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