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승 표 은승표 코리아정형외과 원장
# 1982년
스키를 좋아했고, 방학 때는 재미있게 놀고 보자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의과대학 신입생에게 스키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당시 학내에 세게 놀던 선배들이 대부분 스키부였기 때문이다. 겨울뿐 아니라 평소에도 음주가무로 자주 합숙 상태를 유지하던 스키부는 답답한 의과대학 생활 중 외부 세계로의 돌파구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낭만적일 것으로 기대했던 스키부 합숙은 의외로 엄격한 훈련의 연속이었다. 대학스키연맹 등록 선수로서 각종 스키 대회에 참가했기 때문이었는데, 엘리트 선수들을 따라가기는 힘들었지만 선수들을 따라 하는 과정에서 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앞으로 스포츠의학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스키 경기 레이스 중인 필자. 1986년]
# 1999년
세월이 흘러 정형외과 전문의가 되었지만 아쉽게도 스포츠의학에 대한 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고민 끝에 스포츠의학 선진국인 미국으로 연수를 가기로 결정했다. 내친 김에 원 없이 스키나 타고 오자는 생각으로 미국 스키의 발상지와 같은 곳인, 버몬트주립대 스키부상 연구팀을 연수기관으로 정했는데, 준비 과정에서 스키부상이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 것을 알게 되었다. 자료 수집을 핑계로 각국의 스키장들을 돌아다녔고, 운 좋게 대가들을 만나서 가르침도 많이 받았다. 수집한 자료들을 모아 ‘스키부상의 역사’라는 책도 한 권 썼다. 귀국 후에는 대표적인 스키부상인 전방십자인대를 주제로 수술과 재활을 접목시킨 스포츠의학 전문 병원을 개원하여 20년 동안 유지해오고 있다.
놀려고 탔던 스키가 공부의 대상이 되었고, 읽고 쓰기 싫어서 이과를 선택했는데 글을 쓰고 있다. 학생 때는 스키 타고 노느라 가산을 탕진했는데, 이제는 스키 덕분에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세상만사 정말 모를 일이다.
[스키부상의 역사. 은승표 저]
# 2010년
2010년 평창동계올림픽 개최가 확정되었을 때 일종의 숙명 같은 느낌을 받았다. 대한스키협회와 국제스키연맹 의무위원을 맡고 있던 시절이라 조직위원회와 일을 시작하였고, 2014년부터는 스키경기장 의무책임자에 위촉되어 본격적인 준비 활동을 하였다. 2015년 콜로라도 비버크릭 스키장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활강경기장에서 스키를 탔는데, 의사들도 서 있기도 버거운 경기장 환경에서 스키 훈련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하고는 전국의 스키 좀 탄다는 의사들을 수소문하여 같이 스키를 탔다. 일요일 새벽 서울 근교 스키장에 모여서 의무지원에 필요한 기술들을 연습 했고, IOC, FIS(국제스키연맹)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학술 행사를 통해 이론적인 준비도 병행하였다. 2015년 말 정선 활강경기장이 완공된 이후에는 패트롤, 응급구조사 등 실무 인원들과 함께 실제 경기장에 들어가 설상 구조 훈련을 진행했는데, 기온이 영하 25도까지 떨어졌던 적도 있었다.
# 2018년 2월 9일
2018년 2월 9일 드디어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렸다. 그간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문제들이 쏟아져 나왔다.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려 올림픽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저조했다. 열악한 근무 환경으로 인해 중도 이탈한 인력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운영진의 피나는 노력 덕택에 역대급의 스키 경기장을 완성하였고, 준비된 의무지원팀의 지원 하에 선수들은 안전하게 경기를 치를 수 있었다.
선수들이 눈을 지치고 지나갈 때 들리는 특유의 굉음, 정신없이 오가는 레이스팀들의 무전기 대화 소리 등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이런 극적인 올림픽 경기 현장의 한 복판에 내가 서있었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었다. 그렇게 운명처럼 다가온 동계올림픽은 3주간 여러 가지 추억을 내 마음 속에 남기고 막을 내렸다.
[정선알파인센터 의무지원팀 단체 사진]
# 1982년~2018년. “나와 스키, 그리고 동계올림픽”
평창동계올림픽이 내게 남겨 준 가장 큰 유산은 ‘Friendship’ 이다. 4년여의 준비기간 동안 스키와 올림픽이라는 두 가지 공통 관심사를 주제로, 생면부지의 국내외 사람들이 만나 같이 일을 하였다. 올림픽 의무지원을 목표로 같이 스키 훈련을 하였던 친구들의 모임은 행사 이후에도 지속되어, 겨울이면 같이 스키를 타고, 여름에는 자전거, 등산, 다이빙 등 다양한 레져 활동을 즐기고 있다. 스키 경기 뿐 아니라 축구, 격투기 등 다른 종목의 의무지원 활동도 하고 있으며, 스포츠의학을 테마로 한 학술 행사도 진행할 계획이다. 올림픽 덕분에 평생 같이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긴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Olympic Legacy 이다.
[오싸디 : 올림픽 스키경기 의무지원팀 싸이클 디비젼 모임]
[필자. 정선알파인센터]
# 필자 약력
은 승 표
정형외과/스포츠의학 전문의
은승표코리아정형외과 원장
2018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 의무전문위원, 정선알파인센터 의무책임자
서울시체육회 의무위원장, 대한스키지도자연맹 의과학위원장, 대한태권도협회 의무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