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의사가 된지 31년이 되었지만,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턴과 레지던트로 근무하면서 만나는 환자에게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당혹스러울 때가 많았다. 분명히 의과대학을 다닐 때 나름대로 많은 것을 배웠으나, 대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았고, 관련 지식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자신이 없었다. 그 후 이러한 경험은 후배 의사들도 졸업 후 일정 기간 동안 대부분 겪고 있으며, 학생 때의 학업성취도와 의사로서의 진료 역량은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의과대학을 다닐 때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의 각 과목을 학문 자체의 지식 구조에 따라 배웠고, 질환을 중심으로 사실적 지식의 습득에 치중하여 학습하였을 뿐, 환자를 만났을 때 환자가 호소하는 주소로부터 진단과 치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학습과 훈련이 부족한 결과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많은 고민을 하였고, 의학교육에 대한 전면적 인 혁신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미래의 의사를 양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과정인 의과대학 또는 의학전문대학원의 기본의학교육(basic medical education)에 대한 단편적인 생각들을 간략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지난 10년간 의학전문대학원 학제와 의학교육 평가인증제도 도입에 따라 많은 대학들이 기본의학교육과정을 개선하여 왔다. 2009년에는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의사국가시험에 실기시험을 교육측정학적으로 타당한 합격선 설정 방법인 modified Angoff method을 동시에 도입하여 시행하였다. 의사국가시험 중 실기시험은 임상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환자의 주소 또는 임상표현(clinical presentation)에 대해 최소한의 진료 능력(minimum competency)과 환자 및 환자 안전을 배려하면서 기본적인 임상술기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으로 각 대학의 임상교육에도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제는 학생들이 의과대학 또는 의학전문대학원 재학 중에 단순히 ‘의사가 알아야 할 지식’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고, 핵심 지식, 핵심 개념과 원리를 진료 현장에서 활용하고, 필요한 임상술기를 안전하게 시행하며, 바람직한 전문직업적 태도를 갖추는, 즉 ‘할 수 있는 능력(역량, competency)'을 길러야 한다는 공감대가 서서히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부 대학과 일부 의과대학 교수님들은 100년 전인 1910년에 Abraham Flexner가 제안한 의학교육 패러다임인 2년 단위로 분리된 과목 중심의 기초의학교육과 임상의학교육을 견지하고 있어 의학교육의 개선 또는 혁신에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 우리나라 41개 의과대학과 의학전문대학원에서는 지난 100년 동안 외국의 의과대학에서 변천해온 의학교육과정인 ‘과목중심 교육과정’, ‘장기계통 중심 통합교육과정’, ‘문제바탕학습 교육과정’, ‘임상표현 교육과정’등을 모두 관찰할 수 있다. 의과대학 또는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시행하는 기본의학교육의 일차적인 목표는 우리나라는 물론 국제사회가 필요로 하는 현재가 아닌 미래의 사회적인 건강 요구(social health needs)에 부합할 수 있는 ‘좋은 의사(good doctor)’를 양성하는데 있다. 물론 각 대학은 교육이념, 교육목표와 교육 여건에 따라 다양한 고유의 의학교육과정을 운영하여야 하지만 미래의 좋은 의사를 양성하는 사회적 책무를 달성하기 위한 의학교육과정의 기본 골격과 운영 원칙은 모든 대학이 동일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의과대학 및 의학전문대학원의 입학전형도 일정 수준의 수학능력을 갖춘 학생을 1차 선발한 후 앞으로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는 개인적 인성과 자질을 갖추고 이러한 특성이 기본의학교육에 의해 더욱 고양될 수 있는, 즉 좋은 의사가 되는데 ‘적합한 학생(right student)’인지를 평가하여 최종 선발하는 방법으로 바꾸어야 한다. 지난 30년 동안 인지과학 또는 학습과학 영역에서도 많은 진보가 있었다. 사실적 지식을 충분히 습득하고, 개념과 원리를 이해하여, 이를 문제 상황 또는 사례에 적용하는 전통적인 학습방법은 필연적으로 지식의 망각을 초래하고, 오히려 고등사고능력의 개발을 저해하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학생이 장차 해결하여야 상황(context) 또는 잘 정의되지 않는 문제(ill-defined problem)로부터 학습을 시작하여 문제해결에 필요한 관련 지식, 개념, 원리 등을 탐구하고 그 결과를 통합하여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학습을 하여야 관련 지식을 더 오래 기억하고 실세계 문제해결(real-world problem solving)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상추론을 통해 임상적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일반적인 역량(generic competency)이 아니고, 맥락특이성(context specificity)을 가지고 있으며, 과학적 추론 능력 개발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임상적 문제해결능력은 반드시 해결하고자 하는 상황을 바탕으로 조직화된 지식(context-based organized knowledge)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한데, 조직화된 지식이란 교과서나 논문에 나와 있는 명제적 지식(내용 지식)과 함께 그 지식을 언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아는 절차적 지식(상황 지식과 전략 지식)이 통합된 전문지식(professional knowledge)을 말한다. 이러한 연구결과들은 의학교육도 이제는 변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시사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세계보건기구는 기본의학교육과정도 학생중심, 직무중심, 역량중심으로 1990년대 이후 Ronald M Harden 등은 의학교육도 다른 교육과 마찬가지로 학습 성과 바탕 교육(outcome-based education)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제안을 하였다. 현재 외국의 많은 의과대학들은 학습 성과 바탕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고, 국내에서도 아직은 부분적이지만 2개의 대학이 학습 성과 바탕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학교육평가원에서 제시한 Post 2주기 의학교육 평가인증 기준도 학습 성과 바탕 교육과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학습 성과 바탕 교육과정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각 대학은 좋은 의사의 속성, 고유의 건학이념, 교육목표, 교육여건 등에 따라 학생들이 그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갖추어야 할 역량(exit outcomes, graduate capability)을 설정하고, 각 졸업 역량에 도달했는지를 평가할 방법과 기준(criteria)을 먼저 설정하며, 이를 토대로 교육과정을 하향식으로 설계하여 운영하여야 한다. 또한 졸업 역량의 각 역량을 학년별 또는 교육과정 시기(phase)별로, 평가 방법 및 평가 기준과 함께 더욱 구체화하여야 한다. 이에 따라 학년별 또는 시기별로 학생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학습경험을 하게 할지를 정하고, 학습경험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교수-학습방법과 함께 가능한 최소한의 필수적인 핵심학습내용을 선정하여야 한다. 모든 학습경험은 졸업 후 의사가 되었을 때 흔하게 또는 중요하게 접하게 될 현실적인 상황(context)으로 시작하고, 학생 스스로 책임을 지고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지식, 술기, 태도를 습득하여, 메타인지 능력, 성찰 능력과 함께 궁극적으로 실세계 문제해결 능력을 기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교수는 단순한 지식 및 술기의 전수자가 아닌 역할모델, 발판대주기(scaffolding), 코치, 촉진자의 역할을 하여야 하며, 학생의 학습경험을 관찰하고 평가하여 적시에 피드백을 해주고 학생의 개선 결과와 능력 향상을 확인하여야 한다(형성 평가 및 총합 평가). 각 학년별 또는 시기별로 학교가 정해놓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학생들은 추가 학습(remedial learning)을 하게하여 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생의학적 지식 영역의 과목별 통합 수준에 머물고 있는 현재의 장기계통 중심 통합교육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학생이 생의학적 지식은 물론, 인문의학 요소, 사회의학 요소를 모두 통합한 지식, 술기, 태도에 대한 학습경험(integrated learning)을 할 수 있도록 통합교육과정의 설계 및 운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더불어 각 과목별로 학생마다 다른 일정에 따라 실시하고 있는 임상실습도 가능한 모든 학생이 교육목적에 따라 동일한 순서대로 실습할 수 있도록 개선이 필요하고, 궁극적으로는 임상실습도 각 과목별 실습에서 통합실습으로 바꾸어 교육의 효과성과 연속성을 제고하여야 한다. 기초의학 교육도 통합교육의 일부가 되어 현실적인 맥락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하고, 사실적 지식의 단순한 전달이 아닌 생명 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원리와 개념 학습으로 전환하며, 이를 현실 상황에 적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과학적 사고와 추론 능력을 기르는데 일차적인 목적을 두어야 한다. 또한 기초의학 교육의 효과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현재 저학년에 주로 편성되어 있는 기초의학 교육을 미국의 20여개 대학에서 이미 실시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 학년에 걸쳐 통합하여 편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편 특정 학교가 건학이념과 교육목표에 따라 역량을 갖춘 미래의 의사과학자(physician-scientist)를 양성하고자 한다면, 학생 스스로 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작성하여 발표하는 학습경험을 할 수 있는 별도의 교육과정 설계와 실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의학교육과정도 완벽한 교육과정은 없다. 북미와 유럽의 경우에도 1870년 이후 의학교육 과정은 지속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각 대학은 사회적 건강 요구의 변화를 미리 예측하고, 학습에 대한 과학적 연구 결과와 증거를 수용하면서 현재 운영하고 있는 교육과정의 효과를 주기적으로 검토하여 좀 더 바람직한 의학교육 과정으로 개선 또는 혁신하고자 하는 노력을 계속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