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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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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오정희 (1926 ~ 1995) 우리나라 재활의학의 선구자 (헌정일 : 2015-03-24)

공적사항

인해(仁海) 오정희 교수는 1926년 6월 1일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5남 3녀 중 셋째로 전라북도 익산시 황등에서 출생하였다. 일제하에서 일찍이 신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던 부친은 황등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8남매를 모두 서울로 유학을 보냈다. 오정희 교수는 이리여중을 졸업하고 서울의 이화여고에 진학하여 1943년 고등학교를 수석 졸업한 후 관립 고등여자 사범학교에 진학하였다. 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 생활을 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여 교직을 포기하였고, 해방이 되던 1945년 다시 의학에 꿈을 두어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였다. 의예과를 마치고 학업을 진행하던 중 결혼을 하게 되어 서울여자의과대학(現 고려의대)으로 전학하였고 1951년에 졸업하였다.

오정희 교수는 1952년부터 국립재활원 의무과 과장으로 일하였고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절단환자와 재활을 필요로 하는 환자들이 늘어가는 것을 보면서 '재활의학'이라는 학문의 개념도 없던 불모지인 대한민국에서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하였다. 1956년에 미(美)국무성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당시 부산항에서 화물선을 타고 한 달간의 긴 여정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다시 뉴욕으로 이동하였다. 오정희 교수는 뉴욕대학교 의과대학 재활의학연구소에서 '재활의학'이라는 학문분야를 처음 창시한 '세계재활의학의 아버지'인 故러스크 박사의 애제자로 수학 후 1957년 8월에 귀국하였다. 오정희 교수는 다시 국립재활원 의무과 과장으로 재임하면서 환자를 진료하였고 1963년 9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재활학부에서 연구한 후 귀국하였다. 오정희 교수는 국립재활원 의무과 과장으로 1969년 1월까지 재임하면서 국내에서 처음으로 "재활의학"이란 용어를 사용하였고 이 용어의 공식 제정에 관여하였다.

1968년 2월 국립부산대학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69년 1월 우석대학교 의과대학에 조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한국은 재활의학 학회도 없었으며, 전문의 자격제도도 없었던 시절에 1970년 4월 우석대병원에 재활의학과를 창설하면서 재활의학교실 주임과 우석병원 재활의학과장을 역임하였다. 이것은 국내 의과대학에서 '재활의학교실'과 대학병원의 '재활의학과'의 시작이었다. 1971년도에 우석대가 고려대에 병합되었고 국내 재활의학과 전공의 수련프로그램’이 시작하였고, 1975년에는 대한민국의 재활의학과 첫 전문의를 배출하였다.

1971년에는 대한재활의학회의 창립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2회(1980년 10월-1982년 10월, 1984년 10월-1986년 10월)에 걸쳐 대한재활의학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오늘날 대한재활의학회가 가장 활발하고 모범적인 학회로 우뚝 설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외에도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를 지내면서 아시아 재활의학회지 편집위원, 제21차 세계여자의사회 학술분과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한국인 유아의 척추 및 사지골의 성장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부산의대잡지 7(2):37, 1967) 외 108 편의 많은 논문과 업적을 쌓았다. 세계재활재단 임원, 군진의학자문관, 한국근육디스트로피보호회 회장, 한국뇌성마비복지회와 기타 복지재단 이사 등 많은 사회 활동을 통하여 장애인에 대한 사랑과 봉사를 실천하였다. 1985년 대학서림발간 재활의학 외 3권의 재활의학에 관한 저서를 집필하였으며, 후학은 물론 장애인에 헌신한 공로로 1983년 4월 7일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