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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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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한심석 (1913∼1983) 간 질환 연구의 개척자. (헌정일 : 2012-03-29)

공적사항

한심석은 1913년 5월 23일 평안남도 강서군 수산면 가현리의 한씨 동족마을에서 부친 한제건과 모친 김정건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심석은 9세 때 영신학교를 거쳐 1927년 기독교계 학교인 광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광성고보에서는 성경을 가르치던 교사 김태열로 부터 위대한 의학자들의 전기를 들으면서 의학을 전공하려는 마음을 굳혔다. 그는 1913년 광성고보를 졸업하고, 이듬해에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지원했다. 그러나 시험성적이 좋았어도 합격을 장담할 수 없었다. 1929년 광성고보 재학 당시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여 백지 답안지를 내고 퇴장한 일로 평양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강제 귀향조치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경성제대 입학시험 면접 때 그때 일을 질문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합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1938년 졸업 후 곧바로 미생물학교실 제1강좌의 부수에 임명되어 호소카와 밑에서 연구생활을 시작했다. 한심석은 약 한달 뒤에 조수 발령을 받고, 호소카와가 부여한 과제를 해결하러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 전염병실과 경성부립 전염병 전문병원인 순화원을 다니며 당시 만연했던 디프테리아 균주들을 분리 배양하는 작업을 했다. 그는 이 결과를 1939년 조선의학회 총회와 이듬해 일본연합미생물학회에서 발표하고, 이를 도쿄 전염병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실험의학잡지』에 게재했다.

그러던 중 경성제대 의학부 내과학교실 제2강좌를 맡은 이토 마사요시 교수가 호소카와를 통해 자기 교실로 와달라는 제안을 해왔다. 간비질환 중 반티 증후군에 미생물학교실 출신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토는 도쿄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미국 메이요 클리닉에서 내과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임상부문의 유일한 미국 유학파 학자였다. 그는 1940년 12월 이토 내과에 입국하여 임상수련을 받으며 연구를 도왔다. 1942년 일본내과학회에서 「만성간비질환에 있어서의 혈중보체량의 감소현상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1943년 「경성에 유행하는 디프테리아 균형」이라는 주논문으로 경성제대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강사에 임명되었다. 그는 1944년 6월 이토 교수가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장으로 취임한 뒤로는 사실상 제2내과를 책임지다시피 했다.

해방 직후 경성제대 의학부는 경성대학 의학부로 개편되었고, 한심석은 제2내과의 조교수로 부임했다. 1946년 남해안 일대에 콜레라가 발생하자, 그는 경성대학 의학부 방역반장이 되어 현지 방역에 나서기도 했다. 정국은 물론 학내 분위기도 각종 분규로 뒤숭숭한 상태였지만, 그는 당시 만연하던 장내 기생충 질환에 대한 연구 및 식생활 관련 소화기질환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의대 부속병원이 육군 제36병원으로 재편되어 부산으로 내려가자 이에 합류하여 진료를 했고, ‘전시연합대학’에 참여했다. 1951년 말 이세규의 요청으로 이화여대 의학과장 및 병원장을 3년간 겸임하면서 교수진을 확충하는 등 이화의대의 기초를 다지는 데 힘썼다.

한심석은 1955년 미네소타 프로젝트에 따라 교환교수 제1진의 일원으로 미네소타대학에서 간 질환 연구에 매진한 뒤 1956년에 귀국했다. 이때 그는 간정맥도자법과 혈중 암모늄 측정에 필요한 기구, 간침생검용 실버먼 침과 맹기니 침 등을 들여왔다.

1958년 서울의대 내과 주임교수를 맡게 된 그는 당시까지 분리·독립되어 있던 서울의대의 4개 내과를 단일 내과로 통합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1959년 대한의학협회·대한내과학회 합동학술대회에서 「한국인 간경변증의 임상적 연구」를 숙제보고로 발표했다. 1966년 9월에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제3회 세계소화기병학회에서 「한국의 원발성간경에 관한 임상적 연구」를 발표했다. 1955년부터 1965년까지 11년간 간침생검법과 수술을 통해 얻은 원발성간암 환자 250례를 분석하여 간디스토마증과 음주와의 상관관계가 높다는 것을 밝혀냈다. 이 밖에 간디스토마증·간염·담도질환 등에 관한 연구 등 간질환의 실태를 밝히고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으며, 많은 문하생을 길러냈으며, 1960년에 국제간연구회 한국지부장을 맡았다.

한심석은 1964년 10월 제8대 서울의대 부속병원장이 되었다. 그는 정부의 예산 지원을 적극적으로 받아내어 기존 시설을 보수하여 교직원 처우를 개선했으며, 서울의대 부속병원 신축에 관한 종합계획을 수립하여 현재의 서울대학교병원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는 1970년 4월 서울대학교 부총장을 거쳐 11월 제11대 총장이 되어 관악캠퍼스 건설과 이전을 총지휘했으며, 제12대 총장까지 연임했다. 그러나 1975년 관악캠퍼스 이전을 이룬 직후 임기를 3년여 남겨 놓고 총장직을 사임했다. 지난 11년간 막중한 보직을 맡으면서 건강이 악화된 것이 이유였다. 1년간 휴식을 취한 뒤 1976년 다시 의대 교수로 재임용되었고, 1978년 8월 정년을 맞았다. 1965년에 녹조훈장, 1970년 12월 모란훈장을 받았고, 1972년에는 간질환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수상했다. 그는 정년퇴임 일에 무궁화훈장을 받았다. 퇴임 후 5년간 힘겨운 투병생활 속에서 회고록을 집필한 그는 척추종양으로 1983년 10월 12일 7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