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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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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학송 (1907 ∼ 1981) 우리나라 비뇨기과학을 정립한 선구자. (헌정일 : 2012-03-29)

공적사항

이학송은 우리나라 비뇨기과학을 정립하였고 한국 최초의 한글판 비뇨기과학 교과서를 출간한 비뇨기과학의 선구자이다.

이학송은 1932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세브란스의전 교수 및 병원장으로 근무하다 1949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비뇨기과학교실의 제2대 주임교수가 되었다. 취임하고 얼마 안 되어 한국전쟁의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병원 스코트(Scott) 교수를 사사하여 1년간 연수를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 후 그는 스코트 교수에게 전수받은 전립선(prostate) 수술기술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새로운 치료방법을 후배, 제자들에게 가르치며 활기찬 출발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그를 통하여 도입된 치료 기술들은 국내 비뇨기과학 발전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교실 부흥에 힘쓰던 그는 학생용 교과서가 없는 것을 걱정하여 교과서를 편찬하고자 애썼는데 그 결과 1957년 심혈을 기울여 국문판 비뇨기과 교과서를 발간했다. 이는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처음 보는 교과서로 칭찬이 자자했고, 학계 입장에서 커다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1954년 6월 20일 대한의학협회 산하의 대한피부비뇨기과학회는 피부과학회와 비뇨기과학회로 분리하기로 결정되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1959년 10월 3일 제11차 대한의학협회 대회에서야 비로소 비뇨기과학회가 독립적으로 개최되었다. 그의 노력으로 인하여 비뇨기과학회가 독립적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업적으로 인하여 비뇨기과학회 입장에서 어버이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학회장인 이학송은 1960년 거금을 희사하여 어느 학회 보다 먼저 학회지를 발행했다. 그 후 10년간 학회지 발간에 남다른 열정을 기울여 훌륭한 학회지로 성장시켰다. 당시 비뇨기과학교실이 독립된 대학은 서울의대뿐이었기 때문에 약 10년간 이 학회지에는 서울의대 비뇨기과학교실의 논문이 주로 실렸다.

학회지의 발간사를 통해 그의 학문에 대한 애정과 열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세계 비뇨기과학회에 가입하기 위해 그는 1967년 뮌헨에서 개최된 제14차 국제비뇨기과학회에 참석하여 한국지부의 승인을 얻었다. 그 후 국제학회에 많은 회원이 참가할 수 있게 했다. 당시 비뇨기과학회가 최초로 국제학회에 가입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노력은 학회 발전에 커다란 초석을 제공했다할 수 있다.

이학송은 1949년 11월 서울의대 비뇨기과학교실 주임교수를 맡고 1969년 퇴임할 때까지 20년간 한국 비뇨기과학의 초석을 쌓았고, 학회 회장으로서 대학의 주임교수로서 진료, 교육 및 연구에 헌신한 결과 신생 대학의 주임교수로도 많은 인재를 보내고 교과서 편찬, 학회지 발간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요약하자면 이학송은 대한비뇨기과학회 창설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학회지 발간과 교과서 발간 등 한국 비뇨기과학 태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고, 체계적인 교육에 지대한 공헌을 하여 대한민국 비뇨기과학의 어버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