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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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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영균 (1921 ~ 1994)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심장수술의 개척자 (헌정일 : 2012-03-29)

공적사항

이영균(李寧均)은 1921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1938년 춘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8년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하여 1944년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서울대학교병원 외과학교실에 입국하여 8년 후인 1952년에 전임강사 발령을 받았다. 무급조교 생활 8년이라는 것이 서울대학교의과대학 내에서는 유명한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1954년 학부 2학년생에게 일반외과 총론을 강의하다가 갑자기 하악골골수염으로 하악반절제술을 받았고, 1년 후 회복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 한국의 심장외과 분야는 불모지였다. 그런데 이영균이 심장외과를 선택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심장이라는 것이 수술하는 데 어려운 부위니까 한번 도전해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는 37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새로운 지식과 수술경험을 얻기 위해서 1957년 8월 미국으로 건너가 미네소타대학에서 장기 연수를 했다. 당시 미네소타대학은 릴리하이(Lillehei) 교수와 그 심장 수술팀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많은 심장외과 의사들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전세계로 진출하여 현대적 의미의 심장외과를 만들게 되었다.

이영균은 릴리하이 교수의 심장수술팀에서 2년간의 연수를 마치고 1959년에 귀국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의 국내 상황은 개선의 여지가 없었다. 다른 수술과 달리 개심술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여러 장비와 재료가 필요한데, 국내에는 이러한 물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전혀 없었다. 그 당시 국내 정황으로는 이러한 물품을 미국에서 구입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1959년 국내 최초로 개심술을 시도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첫 번째 개심술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잠시나마 실의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 후 인체에 대한 개심술을 성공적으로 시행하려면 동물에 대한 경험이 축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수많은 동물실험을 시행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할 때마다 아주 어려운 시기였다고 말하곤 했다. 심장수술이 성공하지 못한 시기이므로 돌봐야 할 환자도 없었고, 연구비 지원도 거의 없어서 다른 실험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심장수술의 동물실험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끊임없는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었다. 1963년 국내 최초로 심장중격결손 환자를 대상으로 개심술을 통한 교정 수술을 진행하여 성공한 것이다. 그는 당시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때는 재료상도, 실 같은 것도 없었다. 실도 미네소타대학에 있을 때 수술장 간호원한테 사정사정하여 버리려는 것을 얻어다 가져와서 소독해서 썼다.”

1960년대 중반 당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새로운 인공심장 펌프를 사줄 여유가 없었다. 이영균은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가 쓰던 인공심장 펌프인 시그마 모터 펌프(Sigma motor pump)는 그가 귀국할 때 미네소타대학에서 쓰던 것을 갖고 온 것이다. 그는 실의에 빠져 방황하다가 다시 유학을 선택했다. 1965년∼1966년 스웨덴 웁살라대학의 별크 교수 문하에서 연구하고 돌아온 것이다. 귀국 후 몇 년이 지나 새로운 현대식 인공심장 펌프가 구입되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개심술의 성공률을 높이면서 국내 개심술의 개척자로서의 위상을 다져나갔다. 당시에 그가 시행한 수술은 대부분 국내에서 최초로 시행하고 성공한 수술로 기록되었다.

이영균은 1982년 제4대 서울대학교병원장에 취임했다. 1983년에는 제6대 아시아 흉부외과학회 회장도 맡았다. 1986년 평생 몸 담았던 서울대학교병원을 정년퇴임하고, 1994년 8월 식도암으로 인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이영균은 국내 심장수술의 개척자로 오로지 흉부외과를 위해 산 사람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경제적으로 어렵고 미래가 불투명한 시기였으나, 식을 줄 모르는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결국 심장수술의 도입에 성공했다. 그는 국내에서 심장수술이 성공적으로 정착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심장외과의 진정한 개척자이며 지도자였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뜻은 아직도 흉부외과를 시작하는 젊은 후학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