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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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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백인제 (1899 ∼ 납북) 각급 의사조직과 학회의 결성으로 외과학계의 기초를 다진 선각자 (헌정일 : 2012-03-29)

공적사항

백인제는 1899년 근대화의 진원지인 평북 정주에서 전통적인 문신 학자 집안에서 백희행(白禧行)의 4남 3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당숙 백이행(白彛行)과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정주의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3학년 재학 중 3.1운동 시위 주도로 체포되어 퇴학과 동시에 10개월 복역하고, 그 뒤 복학이 허락 되어, 1921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으나, 3.1운동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졸업 후에 의사면허를 취득하지 못하고 2년간 총독부의원(總督府醫院)의 부수(副手)로 근무하다가 1923년에야 면허증을 받고 총독부의원의 의원(醫員)이 되었다.

백인제의 탁월한 의학교육, 연구 및 외과진료의 역량 발휘는 1927년 4월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 강사로 발탁되면서 본격화되어 이듬해 1928년 ?실험적 구루병의 연구?로 동경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9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인으로는 세 번째로 동경제대의 의학박사가 된 것이다. 1928년 6월에는 경의전 외과 주임교수로 승진하였다. 그해 춘원 이광수 선생의 신결핵에 국내 최초로 좌신적출술을 성공적으로 실시하여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백인제는 1930년과 1936년, 두 번에 걸친 구미 의학계의 학사 출장이 있었는데, 구미 여러 의료기관을 방문하여 새로운 의학을 접하고 신선한 자극을 받고 귀국하였다. 첫 번은 Berlin대학 의학부를 비롯한 유럽 유명 의료기관 방문이었고, 두 번째는 1년 2개월간 유럽과 미국의 Johns Hopkins, Mayo Clinic 등에 머물렀다. 그는 갑상선, 유방, 위장, 간담도를 포함한 외과분야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1937년에는 세계 최초로 창안하여 시행한 유착성 장폐색 환자에 대한 장감압술(腸減壓術)은 구미보다 3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1941년 백인제는 13년 동안 지켜온 외과 주임교수직을 사임하고, 스승인 우에무라(植村)로부터1932년 인수받아 후배로 하여금 위탁운영하게 해오던, 현 인제대학교 서울백병원 자리에 있던 외과의원에 ?백인제 외과의원?을 개설하였다. 김희규, 주영재, 윤덕선 등 후배가 동참하였고 백외과는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해방 이듬해 자신의 개인병원을 법인화하여 ?재단법인 백병원?을 설립함으로써 그동안 축적한 전 재산을 사회 환원하는 선각자적 모습을 보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민간병원이 법인이 된 예이다.

해방 직후 백인제는 우리나라 의료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재건 과정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탄생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해방되던 해 경의전 외과학 주임교수 및 부속병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10월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통합되고 나서도 새로 개교한 의과대학 제3외과학교실 주임교수에 임명되어 1947년 1월까지 재임하였다. 각급 의료단체의 창설에도 주도적으로 관여하여, 서울시의사회 초대회장으로 선임되어 1949년까지 2대를 역임하고, 대한외과학회 초대회장으로 선임되어 납북될 때까지 연임하였다. 또 1947년 5월 조선의학협회 창립 상임이사로도 활동하였다.

백인제는 의료계뿐 아니라 사회 각계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납북될 때까지 흥사단 최고위 간부인 의사부장(議事部長)을 지냈고, 1948년 5.10총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하기도 했으며, 서재필 박사 대통령 추대운동에도 동참하였다. 애석하게도 그는 6.25 동란 중인 1950년 7월 19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납북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요약하면, 백인제는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 주임교수로 우리나라 현대의학, 특히 외과분야 의학교육 및 연구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기고, 백인제 외과의원을 개설하여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로 명성을 떨치며, 이 병원을 공익 법인화하여 부의 사회 환원의 모습을 보였으며, 바로 이 <재단법인 백병원> 이 먼 훗날 인제대학교 설립의 토대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각급 의사조직과 학회의 결성과 운영에 지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나라 의학계의 기초를 다지는데 막중한 공을 세웠다. 그는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의사였을 뿐 아니라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진정한 애국자요 선각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