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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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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명선 (1897 ~ 1982) 우리나라 생리학과 의학교육을 위해 헌신한 의학자의 표상. (헌정일 : 2010-03-29)

공적사항

김명선 교수는 1897년 황해도 장연에서 태어났다. 장연군은 한국 장로교 교회가 처음 생긴 곳이어서, 그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평양숭실중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하였으나, 원래 의학을 공부하고 싶었던 그는 1년 후 인 1921년에 세브란스의전에 편입하여 1925년 졸업했다.

1925년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한 후 김명선 교수는 기초의학을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생리학을 밴 버스커크(Van Buskirk)교수 밑에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주로 한국인의 생리학적 특성을 밝히는 연구를 하였다. 1929년 선생은 미국 시카고의 노스웨스턴대학으로 유학하여 당시 생리학의 권위자였던 아이비(Ivy)교수의 지도로 본격적인 연구를 하였다. 1932년 8월 그는 ‘간장추출물이 위액분비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취득한 이학박사학위였다. 이 소식은 동아일보 등 한국의 여러 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그가 미국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에 돌아오는 일정이 매일 보도될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1933년 세브란스의전에 교수로 복귀하여 강의와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의 논문은 미국의학협회잡지(JAMA)를 비롯한 여러 학술지에 발표되었다. 그는 주로 한국인 신체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는데 예컨대 ‘건강한 조선인의 혈액 크롤 양에 대하여’, ‘조선인의 상식 식품 중에 함유된 자극성 향료의 위액분비에 대한 영향’, ‘실험적 아드레날린 형 동맥경화증에 대한 조선인삼의 영향’, ‘비타민C와 혈당량’ 등 이었다.

김명선 교수는 해방 때까지 세브란스의전에서 생리학 강의를 하였고, 엄격한 태도로 학생을 가르쳤다. 1941년부터는 평양연합기독교병원장을 겸임했다. 1949년 그가 강의해 온 내용을 정리한 ‘생리학강의’를 출판했다. 1924년부터 1961년 9월 군사혁명정부가 공포한 특례법에 의해 정년퇴임을 하기까지 김명선 교수는 2000명이 넘는 세브란스의전 학생들을 강의하고 지도하였다. 그의 애교심은 모든 동창들이 기억에 오래 남아있을 것이다.

김명선 교수는 세브란스의대와 연희대학교의 통합에 기여했다. 일제감점기인 1949년 통합건의서가 에비슨이 두 학교의 교장을 겸임하고 있을 때 문교부에 제출 된지 7년이 지나 서야 이루어졌다. 김명선 교수는 세브란스의대 학장이자 세브란스 측을 대표하여 교섭을 추진하여 한국전쟁의 발발과 세브란스 측의 강력한 반대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나, 결국1956년 말 통합이 성사되고, 그는 새로 출범한 연세대학교 이사회의 부총장으로 선출되었다.

해방 직 후인 1945년 11월 김명선 교수는 미군정 문교부 의학교육 담당관을 맡았다. 1946년 그는 의학의 새로운 경향을 국내에 소개 보급하기 위해 ‘조선의사신보’라는 학술지를 발간했다. 이를 통하여 설폰아미드, 페니실린, 성병 등 새로운 의학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뿐 아니라 조선의학협회 부회장, 세브란스의대 학장 등을 맡으면서도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생리학 교과서를 집필하였고, 의학교육과 의학 발전에 매진함으로써 한국 의학계 재건에 기여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생의 활동은 더 다양해졌다. 문교부장관 고문, 보이스카웃 한국연맹총재,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이사, 대한가족계획협회 회장, 원자력위원 및 병원장, 대한기독교서회 이사장 등 여러 가지 중요한 직책을 맡아 수행했다. 김명선 교수는 이와 같은 활동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학술원 공로상등 많은 표창을 받았다. 이 후 1982년 4월 24일 85세를 일기로 타계할 때까지 한국 생리학은 물론 의학, 과학계 전체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사후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가 해부학 교재로 제공되었으니, 그의 의학교육을 위한 헌신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