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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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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조중삼 (1913 ∼ 1980) 우리나라 영상의학의 선구자. (헌정일 : 2011-03-29)

공적사항

조중삼 교수는 1913년 1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1931년 경성공립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1921년 한국에 와서 1945년 광복까지 경성제국대학병원에서 방사선의학을 담당하였던 스즈끼 모또하루(領木 元晴) 교수의 강의에서 "뢴트겐 없이는 의학이 없다“라는 말에 크게 감동되어 졸업 후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방사선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방사선과가 정형외과에 소속되어 있어 처음 발령은 정형외과 조교였다. 그 후 8년 간 스즈끼 교수의 지도를 받으면서 대한민국의 초창기 방사선의학을 태동시켰고, 1938년부터 45년까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초대 주임교수도 역임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조중삼 교수는 이부현, 김동창과 함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방사선과학교실을 세웠고, 주동운, 안치열, 김희섭, 김정진 등을 교실원으로 받아 교실의 기반을 다졌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 서울대학교 방사선과 주임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 교육과 대학원 교육을 수행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마산결핵요양원에 잠시 재직 후 부산으로 옮겨 개업했지만, 전시연합대학이 설립되어 다시 강의를 시작하였다. 조중삼 교수의 강의는 명 강의로 정평이 있었고, 그의 강의에 감동되어 방사선의학을 전공하게 된 교수도 있었다. 1956-7년에는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부원장과 원장직무대행을 역임하였다. 1959년 빈혈(방사선 과다 피폭에 의한 재해로 추정)로 1년간 요양을 하였고, 1960년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사임하고 대전으로 옮겨 조중삼 X선과의원을 개원하였다.

조중삼 교수는 광복 이전부터 조선 렌트겐협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 10월 대한방사선의학회가 창립되었을 때 초대 의사부회장에 선출되었다(회장 이부현, 방사선사부회장 박양규). 이후 1948년부터 1961년까지 2-6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대한방사선의학회의 기틀을 만들었다. 회장 재임기간 한국전쟁과 대한방사선기술학회의 독립 등 격변기를 거치면서 학회를 일사분란하게 이끌었고, 1968년 대한X선검진협회가 설립된 후에는 초대회장 주동운의 뒤를 이어 1971-1974년까지 제2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검진협회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학술활동에 대한 열성도 대단하여 광복 이후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1948년 결핵 유병률을 조사하여 전 국민의 6.5%라고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또한 1946년 미 군정청에서 만든 방사선방어법을 번역하여 방어법의 기초를 세웠다. 광복 후 학회지 발간 이전인 1947년 ‘조선인 결핵현상에 관한 역학적관찰’ 등을 발표하였고, 1959년 ‘기관지염의 X선상’, 1960년 ‘방사선에 민감한 악성종양’, 1963년 ‘비뇨기계 X선 촬영과 진단의 실지문제’ 등 다수의 논문을 여러 잡지에 게재하였다. 방사선의학 이외에도 보건에 관한 저술도 남겼고, 마지막 학술논문은 1976년 대한의학협회지에 게재한 ‘양성 및 악성위궤양의 감별진단’이었다.

우리나라 영상의학의 선구자로서 역사 기록에도 큰 공을 남겨 대한방사선의학회 잡지 창간호에 ‘한국방사선의학계의 고금’을, 1976년에는 ‘우리나라 방사선의학의 연혁’을 게재하였다. 그는 1980년 3월 29일 68세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