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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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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정일천 (1906 ~ 1993) 해부학의 큰 기둥이며, 의학교육자로서 국가발전에 큰 공헌. (헌정일 : 2010-03-29)

공적사항

정일천 교수는 후학 육성 및 많은 저술 활동을 통하여 한국 해부학 및 조직학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1947년 대한해부학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으로서 한국 기초의학의 기틀을 마련한 학자이다.

정일천 교수는 1906년 6월 20일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9살 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서울 중동학교를 거쳐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경의전을 졸업한 1928년 선생은 경성제국대학 해부학교실의 츠자키 교수의 문하생이 되었는데 지도교수의 영향으로 이때부터 비교조직학적 연구에 몰두하여 100여종의 동물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비교 관찰하였다. 6년간의 해부학 연구과정에서 해부학 전반에 대한 체계적 공부를 하였고 특히 장의 크롬친화세포의 분포와 형태학적 특성 등에 관한 많은 연구를 하였다.

1934년 정일천 교수는 경성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음으로서 한국인 최초의 해부학자가 되었다. 1934년부터 1941년까지 그는 세브란스의전의 해부학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였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선생은 세브란스의전의 해부학교실을 사직하고 경성제대 외과에서 임상수련을 마치고 고향인 마산에 내려가 마산동의원을 개원하여 성공적인 임상의사가 되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새로 재편된 국립서울대학교는 그를 초빙하였고, 정일천 교수는 이에쾌히 응하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초대 해부학 주임교수가 되었다. 1947년에는 나세진 교수 등과 함께 조선해부학회를 창설하고 초대 학회장으로 선임되었다. 해방 후의 불안정 때문에 자신의 연구 보다는 학생교육과 대학원생 교육 그리고 해부학 보급에 힘을 쏟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일천 교수는 피난길을 떠나 결국 1952년 마산의 자신이 일하던 병원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여 3년간 근무하고 정착하려할 즈음, 당시 부산에 신설된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의 학장에 초빙 되었다. 이미 두 번이나 개원의 경험이 있고 또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이었으나, 그는 기초의학의 길을 계속 하기로 하고 이를 수락하였다. 이 후 7년 동안 부산에서 교육에 힘썼고, 1961년에는 ’조직학‘이라는 교과서를 출판했다.

1962년 정일천 교수는 가톨릭의과대학으로 옮겨 해부학교실 주임교수로 조직학과 발생학을 교수하였고, 교학처장, 의무원장, 의학부장등 학교의 주요 보직을 역임하였다. 정년 후에까지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의학용어대사전(1970), 조직학실습(1972), Atlas of Human Histology(1974), 발생학사전(1975), 도해 해부학사전(1976), 기본조직학(1977), 영한 면역학사전(1980), 면역학해설(1981), 하나뿐인 심장(1983), 표면해부학(1985) 등을 단독 혹은 공저로 저술하였으며, 만년에 ‘임상해부학’의 집필을 끝낸 상태에서 출판사를 물색하던 중에 별세하였다.

정일천 교수는 학자로서 연구자로서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늘 그를 원했다. 서울의대, 부산의대, 가톨릭의대가 출범 할 때 마다 그를 모셔가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그는 어디에 가서든 열심히 학생을 교육하고 교실연구원들의 연구역량을 향상시켰다. 그런 점에서 선생은 다른 사람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러한 선생의 봉사정신은 신앙에 바탕을 둔 고매한 인품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일천 교수는 1993년 87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정일천교수는 남다른 애정으로 충실한 교육을 지향했고, 특히 조직학실습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실습 강의와 지도를 몸소 수행하면서 학생들에게 산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뿐 아니라 선생은 해박한 비교조직학적 지식과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훌륭한 문하생을 양성하였으며 이들은 우리나라 의학의 동량이 되어 의학발전에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