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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학회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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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종륜 (1902 ~ 1965) 의학자의 가야 할 길을 몸소 실천한 생리학계의 대부. (헌정일 : 2010-03-29)

공적사항

굴곡이 심한 20세기 한국 의학계에서 일생을 생리학 연구와 교육에 오롯이 헌신한 이종륜 교수는 특히 신경생리학 연구로 일가를 이룬 과학자의 길을 실천으로 후학에게 보여준 학자이자 교육자였다.

이종륜 교수는 1902년 6월 3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휘문의숙을 거쳐 1924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선생은 잠간 임상수련을 받았으나 그 이듬해 경성제국대학 생리학교실의 조교가 되었다. 경의전 때부터 은사인 나카니시(中西政周)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랭글리의 문하에서 자율신경생리학을 공부하고 경성제대 생리학 제1강좌 주임교수로 부임한 사람으로 국제적으로 알려진 학자였다.

1925년부터 1938년까지 이종륜 교수는 오로지 신경생리학 실험에 몰두하였다. 1927년에는 J. Biophysics에 쥐의 회-맹 괄약근의 신경지배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였는데 이 논문은 높게 평가되어 일본의 저명한 교과서에 수록되었다. 선생은 계속해서 ‘적색근육 및 백색근육의 신경지배에 관한 연구’, ‘타액분비의 신경지배‘ 등 우수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1933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경성제대 생리학 강사로 임명 되었고, 1935년부터 는 경의전 강사도 겸임했다. 그의 우수한 연구 성과와 성실성은 나카니시교수를 감동시켜 많은 실험을 주도하였으며, 따라서 많은 공동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다.

1939년 이종륜 교수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생리학 교수로 부임하여 1945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근무하면서 연구와 교육에 전념했다. 해방이 되자 선생은 경의전과 경성대학 의학부 생리학 교수를 겸임했으며, 국립서울대학교가 창설되자 1948년 까지 의과대학 생리학 교수로 근무하였다.

1945년 11월 30일 이종륜, 김명선, 이병희, 남기용 등 15명은 서울 종로구 관훈동 소재 이갑수 교수의 자택에 모여 ‘조선생리학회(나중에 대한생리학회로 개명)’를 창설하기로 하였다. 이 모임에서 이갑수(경성대)교수는 초대 회장으로, 이종륜교수(경의전)는 부회장에 추대 되었다.

1952년 6월 제4회 대한 생리학회에서 납북된 이갑수 회장에 이어 이종륜 교수가 학회장으로 취임하여 1964년까지 제 7대에서 제 18대 회장을 역임하여 대한생리학회을 이끌었다.

생리학의 개척자로 존경을 받던 현직 서울대학교 교수가 가족을 서울에 남기고 광주로 내려간 것은 절친한 친구 최상채(후에 전남대학교 총장)를 도와 설립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지방 의과대학을 육성해 보겠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8년 서울대를 사직하고 광주의대 생리학 교수로 부임하여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였다.

이종륜 교수는 1학년에 결강이 있으면 본인의 과목인 생리학 강의로 메꿀 정도로 학교 발전에 진력하다가 과로로 강의 중 쓰러져서 많은 고생을 하기도 하였다. 학장 겸 대학원장으로 신생 전남대학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러한 공로는 후에 전남의대 동창들이 한맘으로 동상을 건립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종륜 교수는 1962년 전남의대에서 정년퇴임 했다. 퇴임 후 선생은 서울 동소문 자택에서 유유자적하다가 뇌출혈이 재발되어 1965년 7월 29일 별세했다.

이종륜 교수는 일제 강점기에 비교적 순조로운 교육환경에서 학자로서의 길을 꾸준히 추구한 우리나라 생리학의 개척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