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Navigation
Skip to contents

E-NEWSLETTER No.183 June 2026

오피니언

◎ 내일의 의학을 심다: 대한민국 Academic Medicine의 정체성

정 승 은대한민국의학한림원 총무이사

다시, Academic Medicine을 생각한다
처음 ‘Academic Medicine(학술의학)’이라는 말을 접했을 때, 솔직히 그것은 나와는 조금 거리가 있는, 외국의 의과대학이나 거대 의료센터에서나 자주 쓰이는 멀고 먼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치열한 의료 현실 속에서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대학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학생과 전공의를 교육하며, 연구와 학회 활동, 더 나아가 의료정책과 제도 개선에 참여하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내가 젊은 시절 대학에 남고자 했던 이유, 의과대학 교수가 되고자 했던 막연한 마음의 중심에는 결국 Academic Medicine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당시에는 이를 명확한 단어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단순히 환자를 진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의학 지식을 새로이 창출하며, 다음 세대의 의사를 교육하고, 우리 의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삶을 꿈꾸었다. 돌이켜보면 바로 그 마음이 나를 대학에 남기고, 의과대학 교수의 길을 선택하게 한 가장 중요한 이정표였다.

Academic Medicine의 정체성: 지속 가능한 의료의 기반 Academic Medicine은 단순히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의 직업 형태나 근무지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료, 교육, 연구,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하나로 통합하는 의학의 가장 핵심적인 영역이다.

해외에서는 이 개념이 비교적 분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 Academic Physician(학술의사)은 환자 진료뿐만 아니라 교육자, 연구자, 멘토, 학문적 리더, 그리고 보건의료의 공적 책임을 수행하는 전문가로 깊이 인식된다. 즉, ‘오늘의 환자를 진료하면서 동시에 내일의 의학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다. 임상 현장의 문제를 연구 질문으로 바꾸고, 그 결과를 다시 환자 진료와 의료제도 개선으로 연결하는 이 구조야말로 의료의 지속 가능성을 지탱하는 든든한 사회적 기반이다.

위기의 현황: 흔들리는 사명감과 보상의 격차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 의료의 현실을 바라보면, Academic Medicine을 꿈꾸는 젊은 의사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어 우려를 금할 수 없다.

대학병원 교수의 길은 과거에도 결코 쉽지 않았다. 진료, 교육, 연구, 행정의 과중한 부담을 동시에 감당해야 했고, 끊임없는 평가와 승진의 압박도 존재했다. 그럼에도 대학을 선택했던 것은 의사로서의 자부심과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사명감이라는 이름의 희생만으로 젊은 의사들을 붙잡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가장 직관적인 문제는 경제적 보상의 격차이다. 대학병원에서 전문 영역을 지키며 헌신하는 의사와, 병원 밖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의사 사이의 보상 차이가 지나치게 커졌다. 특히 최근 비급여 중심의 진료나 미용의료 시장이 급격히 확대되면서, 의사 면허만으로 진입 가능한 일부 영역의 경제적 보상이 매우 높아졌다. 그 결과 오랜 기간 수련을 받은 필수의료 분야의 전문의들조차 자신의 전문 분야를 떠나 수익성이 높은 영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적 변화는 결국 대학병원의 구인난을 심화시키고, 봉직의와 대학 교수 간의 보상 격차를 더욱 벌려놓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고난도 진료부터 전공의 교육, 학회 및 행정 업무까지 도맡으면서도 상대적으로 낮은 보상을 받는 구조가 지속된다면, Academic Medicine은 결국 소수의 희생에만 의존하는 취약한 시스템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연구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 공공적 가치의 회복
또 하나의 짚어볼 대목은 대학과 사회가 연구의 방향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최근 정부가 의사과학자(MD-PhD) 양성을 중요한 국가 과제로 강조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대학 안에서조차 연구의 성과를 학문적 축적이나 공공적 가치보다는 창업, 기술 이전, 기업화 가능성과 같은 '시장성' 위주로 평가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의학 연구가 산업화로 이어져 새로운 치료법을 환자에게 전달하는 것도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Academic Medicine의 본질이 오직 수익성만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가치 있는 연구가 곧바로 제품이나 회사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진료의 질을 높이는 연구, 교육 체계를 개선하는 연구, 의료 안전과 정책을 다루는 연구, 국민 건강을 위한 공공적 연구역시 Academic Medicine을 지탱하는 위대한 축이다.

현실적인 제도와 문화가 필요한 때
Academic Medicine은 본래 느리고, 어렵고, 때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한 명의 좋은 의사를 길러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하나의 연구 질문이 의미 있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수많은 실패의 축적이 필요하다. 현장의 문제를 제도 개선으로 연결하는 일 역시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렵다. 하지만 바로 그 느린 축적이 대한민국 의학의 수준을 높이고 의료의 신뢰를 지켜왔다.

대학병원과 의과대학은 단순히 고난도 진료를 제공하는 3차 의료기관이 아니다. 미래의 의사를 교육하고, 새로운 의학 지식을 창출하며, 의료의 공공성과 전문직업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이다. 따라서 Academic Medicine을 지속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헌신만을 요구하는 단계를 넘어서야 한다.

진료, 교육, 연구, 사회적 기여가 제대로 평가받는 제도적 보상 체계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한다. 논문 수나 연구비 규모에만 치우친 대학과 병원의 내부 평가 기준을 바꾸어, 교육에 대한 기여와 후배 양성, 의료정책 참여 등도 ‘학술적 기여(Academic Contribution)’로 정당하게 인정해야 한다. 나아가 국가 차원에서도 의사과학자뿐만 아니라 교육전담의사(Clinician Educator), 임상연구가(Clinical Investigator), 보건의료정책학자(Health Policy Scholar)등 다양한 학술 커리어 트랙(Academic Career Track)을 제도적으로 지원해야 할 것이다.

맺으며
젊은 의사들이 Academic Medicine을 더 이상 매력적인 길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 손실은 한 대학이나 병원의 문제를 넘어 우리 의료 전체의 미래 역량 약화로 귀결된다. 좋은 스승이 줄어들고, 지속적인 연구 질문이 사라지며, 의료제도에 대해 책임 있게 목소리를 낼 전문가 집단도 고갈될 것이다.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진정 어떤 의사를 필요로 하는가. 단기간에 높은 수익을 내는 의사도 필요하겠지만, 어렵고 복잡한 환자를 끝까지 돌보고, 후배 의사를 올바르게 길러내며, 의학의 근거를 만들고 의료의 방향을 고민하는 의사가 우리 곁에 꼭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Academic Medicine은 오늘의 환자 진료와 내일의 의학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이 다리가 약해지면 의료의 미래도 흔들린다. 이제는 그 가치를 말로만 확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젊은 의사들이 다시 대학에 남고 싶어 하도록, 연구와 교육과 진료를 함께 수행하는 삶을 자랑스럽게 선택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대한의학회(https://www.kams.or.kr)
(06653)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14길 42, 6층/7층 (서초동, 하이앤드타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