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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65 November 2024

오피니언

◎ 수련제도 개편을 위한 시금석 '정부로부터 독립된 수련평가기관의 수립'에 관하여

김 찬 규응급의학 사직전공의

전공의 수련제도
발달심리학에서 쓰이는 메타인지라는 용어가 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어느 지점에 서있는지, 한 차원 높은 인지과정을 통해 판단하는 능력이다. 수련을 받는 레지던트 입장에서 나를 둘러싼 환경과 나에게 제공되는 교육과정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앞서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어떤 맥락 속에서 어떤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지 스스로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레지던트로서 수련받는 이 모두 공감할 것이다. 당장 내일 근무를 앞둔 채 짬을 내어 발표 준비를 하고, 교수님이 지시한 업무도 수행해야 하는 내가 내 주변을 돌아보고 어떤 환경으로 둘러싸여 있는지 샅샅이 알게 되는 것은 쉽지 않다. 게다가 수련제도를 개선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하자면, 큰 주제만도 수십 가지 하위 항목은 수천 가지에 달할 정도로 다양한 분야가 있고, 각각의 상황 또한 범주가 넓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칼럼에서는 수련제도 개선이라는 항구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 조건에 대해서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는 1885년 서양의학을 받아들여, 1886년부터 근대적인 의사 교육을 시작했다. 이후 1914년 세브란스 병원에서 공식적으로 조선 최초 인턴제도를 도입하였고, 1955년 보건부 예규2485호(1952.7.3.)로 최초의 residency 수련이 막을 열었다. 당시 일본의 영향을 받아 '도제식 훈련'이라는 관행을 차용하였고, 그 후 오랫동안 의국 중심, 해당전문과목 중심의 폐쇄적이고 경직된 수련제도가 유지되었다. 의국 제도는 주임교수의 가부장적 권위를 밑바탕으로 하여 도제적 성격이 매우 강하고, 연차별 위계질서가 엄격하며, 운영 방식은 시스템보다는 주임교수의 특성에 따른다. 위의 결과로 수련은 늘 좋은 결과를 균등히 보장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현대에 이르러서야 전공의 수련과정의 적절성에 대한 관심이 도마 위에 올랐고, 크게 2번의 변곡점을 가지게 되었다. 첫 번째는 1979년 2월 보건사회부 고시 제9호로 제정되어 현재까지 총 6차례의 개정이 이루어진 '전공의의 연차별 수련교과과정'이다. 이는 각 학회별로 연차별 수련과정을 제시하고 있고, 가장 최근인 2019년에 이루어진 개정에서는 '역량중심'의 성과 바탕 수련제도를 지향하며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역량 달성'을 위한 세부과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두 번째는 전공의법이다. 중노동에 시달리며 인권탄압의 피해자였던 전공의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것으로 2016년 12월 23일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전공의의 수련환경 개선 및 지위 향상을 위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전공의법의 주 내용을 살펴보면, 병원별로 산발적 분포를 보이던 수련규칙을 표준화하고, 최소한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구체적으로 수련시간, 휴일 및 연차 유급휴가, 전공의 표준수련 계약서 작성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보건복지부 산하 '수련환경 평가위원회'를 통해 수련조건·수련환경 및 처우에 관한 사항을 심의·평가한다는 내용이다.

상술한 두 가지의 커다란 변곡점 이후 전공의 수련과정이 분명히 개선된 것은 사실이다. 전공의법 이전에 평균 100시간에 달하던 주간 노동시간은 현재 약 77시간 정도로 단축되었고, 학회별로 역량을 평가하기 위한 교과과정도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공의들은 여전히 피교육자가 아닌 값싼 근로자로 대치된다. 수련제도의 개선을 이야기하기 전에 앞서 지루한 역사들을 되짚어본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까지 수련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 빠졌던 것이 뭐였는지 정확히 지적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바로 전공의가 피교육자라는 신분에 해당한다는 사회적 인식 그리고 수련의 질에 대한 Quality control이다. 필자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다음의 몇 가지를 제언한다.

교육수련병원 의무고지 제도
교육수련병원에 환자가 내원했을 때 환자에게 임상수련 중인 의과대학생과 수련 중인 전공의가 진료에 참여할 수 있음을 의무적으로 고시해야 한다. 외래 진료 시에는 참관 등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단순 고지로 충분할 수 있겠지만, 입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진료 과정에 수련의가 참여하는 것에 대한 환자의 동의를 필요로 하는식이다.

작금의 의정갈등을 통해 수련병원이라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전공의의 저비용·고효율 노동력이라는 것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알게 되었다. 수련병원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있는 지금, 수련병원에 내원해 고효율의 진료를 저비용으로 보는 값에는 전공의의 기여가 포함되어있다는 사회적 동의가 필요하다. 동의서는 환자가 입원할 때 받을 수 있는 간단한 서류지만, 이것 자체로서 기능한다기보다는 바로 이곳이 수련병원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즉, 환자에게 내 진료 과정에 전공의가 참여한다는 인식을 의식적으로 깔아줌으로써 수련교육활동에 대한 사회적 동의를 유도하는 것이다. 실제로 2017년 행해졌던 전공의 실태조사에서 약 60%의 전공의들은 교육과 근로의 구분이 모호하였다고 답했고 이와 관련된 다른 질문에서 그 이유를 '직접 시술 또는 수술을 수행할 기회가 적었다'고 들었다. 이를 근거로 봤을 때 교육수련병원 의무 고지화는 교육수련병원이 본디 설치 목적을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전공의 수련과 교육의 질을 평가하는 독립기관 설치
현 수련평가 위원회는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으로서 수련 과정을 평가하고 있지만, 피교육자이자 노동자인 전공의는 수련환경에 대한 평가 기회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또 위원회의 구성원 대부분은 교육자에 해당하는 교수이기 때문에 전공의들의 요구사항은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수평 위의 진짜 한계는 위원구성 문제가 아닌 '질 평가'의 부재이다.

2019년 개정된 ‘연차별 수련교과과정 가이드라인’만 따라가면 전공의 연차별로 어떤 역량 목표를 달성해야 할지는 명확히 알 수 있다. 전공의법 역시 '지도전문의'를 정의하고 있고, 전공의 수련교육을 담당할 전문의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위 두 가지 정책은 효용성이 떨어진다. 그 이유는 지도전문의 배치 미비와 연차별 교육 가이드라인을 어겼을 때의 페널티가 다음 연차 레지던트 T/O의 불이익을 주는 데 그칠뿐더러, 의국의 폐쇄적인 분위기와 도제식 시스템 속에서 적절치 않았던 교육과정들에 대한 피드백은 묵살되기 때문이다. 레지던트의 입장에서 내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음을 알리는 것은 결국 내 의국에 피해를 주는 꼴이 되며, 의국의 엄격한 위계질서는 내 수련과정에 대한 부정적인 feed back을 더욱더 위축시킨다. 게다가 지도전문의 발탁은 병원 운영 차원에서 교육을 위한'투자'개념 손실분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지도전문의가 진료와 수술등 병원의 수익을 위한 활동들을 배제한 채로 교육에만 몰두할 수 없는 구조다. 사실상 지도전문의 제도는 병원별로 레지던트TO를 받기 위한 구색 맞추기용 보직에 불과하다.

이러한 문제점들의 본질은 가이드라인을 잘 지키는지에 대한 quality control의 부재에서 기인한다. 현 수련평가위원회의 구조적인 한계와 보건복지부 산하라는 제한사항은 이를 수행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므로,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은 독립된 수련평가기관이 필요하다. 현재 ‘의학교육 평가원’에서 의과대학 교육과정에 대한 질 평가를 수행하는 것처럼, 그리고 미국의 ACGME가 의대 졸업 후의 의학교육 질을 평가하고 개선하는 것처럼 한국에도 독립적인 '수련위원회'가 필요하다. ‘수련위원회’는 전공의 수련 교육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실제 수련 시행을 평가하고 최종 수료결정 등을 담당하는 수련기관 최고 책임자이다.

정부의 의료개혁1차 시행방안에는 수련환경 개선을 위한 여러 아이디어가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정부가 제시한 '집중 수련시간', '인턴제 개편', '네트워크 수련', '근무시간 개선' 등은 결국 수련과정에 대한 객관적인 feed back과 평가 없이는 ‘의도만 좋았던 허울뿐인 정책’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위해 정부는K-ACGME(가칭)를 신설함으로써 여러 기관으로 흩어진 평가기능에 대한 일원화를 검토하겠다는 내용의 항목이 있지만, 정작 세부안을 살펴보면 크게 잘못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K-ACGME 실현을 위한 방법으로' 수련환경평가위원회 확대'를 제시하는데, 보건복지부 산하의 수평위 기능을 강화하는 것은 정부의 입김에 따라 수련에 대한 평가가 쉽게 좌지우지 될 수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의평원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정책 방향성과 관계없이, 이해관계에 매몰되지 않은 독립된 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보건복지부와 별개의, 의평원과 같은 독립된 K-ACGME가 필요하다.

수련의 표준화
수련의 표준화는 수련병원 의무고지제도를 통한 임상과정에서 수련을 인정받고, 독립된 기관을 통한 수련과정의 질 평가가 이루어진 이후에 달성 가능한 과제이다. 현재의 수련제도는 수련병원별로 교육수련의 질 차이가 분명하고, 업무범위와 업무강도 등이 상이하다. 표준화되지 못한 수련환경 속에서 전공의들은 특정 수련병원에 대한 명확한 선호도를 갖게 되고, 여기에서부터 개인의 '취향','지역', '의과대학과의 연속성'을 다 집어삼킬 정도로 강력한 위계질서가 탄생한다. 작금의 소아과 산부인과 등의 특정과 기피현상과 지역의료 소멸 역시도 특정수련병원에 대한 절대적 선호도가 강력한 배경이다. 수련환경이 표준화되어 수련을 끝마칠 때 누구나 비슷한 수준의 역량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면, 수련병원의 선택과 전공과목 선택은 병원의 순위보다 개인의 기호와 취향이 좌우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환경에서부터 비로소 수련환경 개선과 수련의 질 향상 그리고 더 나아가 진정한 의미의 의료개혁이 가능해질 것이다.

전공의라는 신분으로 메타인지를 갖는 건 쉽지 않다. 내가 무엇을 위해 어떤 역량을 달성해야 하는지 인지하는 건 더더욱 어렵다. 수련환경 개선이라는 꽃은 선의를 가지고 만든 정책이 적절히 작동할 만한 토양 위에서 피어날 수 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씨앗을 심기 위해 밭을 가는 일은 더 빛나는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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