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형 래전 대한의학회 홍보이사/ 경희의대 비뇨의학
필자는 유전의 영향인지, 개인적인 성향에 의해서인지 학생 때부터 술과 맛있는 음식에 대한 사랑을 힘겹게 이어왔다. 전공의, 전임의, 조교수 그리고 미국 연수 등의 시간에서 나만의 탈출구는 음식이었다.
좋은 음식과 좋은 술은 좋은 사람과 좋은 시간을 공유하는 주당들의 정서라고 생각한다. 좋은 위스키와 맛집을 찾아 많은 밤을 지새우면서 어느덧 12갑자가 한 바퀴 돌아오는 환갑을 맞았다. 슬프지만 체력과 주력에 변화를 느끼게 되고 젊은 시절과 같을 순 없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마침 2022년12월, 5년간 맡아왔던 병원장의 소임도 놓고 나니 Bucket list를 작성할 여유가 생겼다. 좋은 사람들과 행복하게 먹고 마시던 시간을 돌아보면서 ‘그렇다면 내가 음식을 요리하고 또 공부해서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의 생각은 꼬리를 물었고, 결국 Bucket list에 ‘요리사 자격증 따기’가 떡하니 자리를 잡았다. 요리사 자격증을 취득해 보자! 그리고 술을 주제로 공부해서 자격증을 따자!!
첫 번째 관문인 필기시험, 휘경동의 한국산업인력 관리공단 시험장에서 CBT로 치렀다. 3주 정도 틈틈이 인터넷 강의의 도움을 받아 어린 친구들 틈에서 최고령으로 당당하게 시험을 쳤다. 결과는 한 번에 합격! 필기 합격은 2년간 유효하고 그사이에, 실기에 합격하면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바로 실기시험 준비에 돌입했다. 실기는 도저히 독학이나 인터넷 강의로 준비할 수가 없어서 가장 적절한 학원을 찾아보았다. 요리학원이나 국가에서 운영하는 기술교육원은 대부분 주간 시간에만 운영되고 자격이 되면 국비로 교육비를 지원해 준다. 나는 주간에 이용할 수가 없어서 주말에만 수업하는 요리학원을 찾았다. 다행히 종로에 있는 요리학원에서 일요일 6시간 동안 주간반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중 요리학원에서 강의하는 일주일 치 메뉴를 다 배우고 실습하는 일요일 반이었다. 바로 학원 등록 완료!
우리나라에서 요리사 자격증 및 소믈리에, 조주기능사 등 다양한 자격증을 발행하고 관리하는 기관은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이다. 공식적인 자격증 명칭은 조리기능사이다. 총 다섯 종류의 조리기능사 자격증이 있는데 한식, 양식, 중식, 일식, 복어요리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이 중 가장 난이도가 높고 기본이 되는 한식조리기능사에 도전하기로 하였다. 자격증을 위해서는 필기시험 합격 이후에 실기시험으로 최종 조리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필기시험은 음식 위생관리인데 이 내용은 이미 과거 예방의학 등에서 배운 개인위생, 식품위생, 식중독, 법규, 공중 보건 등이어서 낯설지가 않았다. 그리고 음식 안전관리, 음식 재료 관리는 효소, 성분 영양소 등이고 한식 조리의 원리, 식생활 문화 한식 조리의 기본 원리 등으로 구성된다.
실기시험은 한식 31가지 요리 중 무작위로 출제되는 두 가지 요리를 지시 요건에 맞게 잘 익혀서 시간 내에 규격에 맞게 적절히 plating해서 내는 것이다. 비빔밥, 생선찌개, 생선 양념구이, 생선전 등과 같이 우리가 흔히 접하는 음식부터 지짐누름적, 화양적, 섭산적, 홍합초 등 일상에서 흔하지 않은 음식까지 다양하다.
모든 요리는 여러 명의 시험관으로부터 적정한 재료의 손질, 위생, 세척의 과정도 평가되고 조리 방법 및 조미료의 사용 등도 평가된다. 익힘 정도도 최종 평가 항목이다. 시간을 초과하거나 적정한 조미료를 사용하지 못한 오작, 타거나 제대로 익지 않은 경우에도 현장에서 바로 탈락한다. 실기를 통과하고 난 후 지금까지의 과정과 조리의 완성도를 평가하여 2주 후 산업인력 관리 공단 홈페이지에 발표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실기시험의 합격률은 30% 정도라고 알고 있다.
첫 번째 실기시험의 쓰라린 기억이 떠오른다. 첫 문제가 ‘생선전을 0.5cm 두께로 4x5cm 크기로 8개 제출하시오’였다. 큰 동태 한 마리가 통째로 재료로 주어지고 시간은 25분이 주어졌다. 합격을 위해서는 생선을 규격에 맞게 8장의 포를 뜨고 밀가루옷과 달걀물은 곱게 입혀서 프라이팬에서 아주 약불로 타지 않게 익혀서 8개를 접시에 담아내야 한다. 시간 내 빨리 비늘 벗기고, 지느러미와 머리를 잘라내고 동태 내장 깨끗이 빼내야 한다.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가고 집중력을 최고조로 올려서 힘을 조절해야 한다. 조심스럽게 생선 등뼈를 기준으로 ‘세장뜨기’ (생선 꼬리에서부터 살을 통째로 발라 잘라내는 방법, 양옆의 살을 발라내고 가운데 남은 뼈는 버린다)하고 살이 으깨지지 않게 생선 껍질은 조심히 벗긴다. 세장뜨기를 마치고 껍질을 벗기고 있는데 시간이 다 지나갔다. 실격...!!
처음에는 취미로 생각해서 Bucket list에 담아 놓은 것을 꺼내 본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시작했다. 그러나 실기시험에서 두 번 불합격이 되고, 이른 봄부터 시작한 요리 실습이 벌써 여름이 지나가도록 큰 진전이 없으니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혼자서 반성과 위로를 반복했다. ‘조금 집중하자!, 주말 골프를 당분간 자제 하자!!’ 세 번째 시험은 정말 자신 있고 작품도 만족했는데 결과는 근소한 점수로 낙방하고 말았다.
가을을 지나 겨울 문턱인 11월 네 번째 시험 날, 마음을 비우려고 노력했다. ‘이번에 떨어지면 12월 연말 여행하고 쉬다가 1월부터 쉬운 양식으로 다시 해볼까?’하는 생각까지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당일 시험은 오징어볶음과 두부조림, 시간은 55분. ‘이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오징어 먹물을 뒤집어쓰면서 다듬고 볶았던가! 얼마나 많은 두부를 자르고, 조렸던가! 고명은 어떻고!’ 다행히 시간에 맞춰 제출하고 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래도 합격 발표가 나오는 2주간은 참 지루하게 느껴졌다. 네 번 도전 끝에 결과는 합격!! 합격!!
조리에 관심과 실습을 해보니, 흔히 먹던 음식도 요리사들의 땀과 열정이 묻어있는 결정체라고 생각하니 좀 더 소중히 대하게 된다. 올 1월부터는 다시 양식 조리기능사 자격증에 도전 중이다. 이후 조주기능사에도 도전할 계획이다. 요리는 집중과 응용력 등이 요구되고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특히 집사람!) 행복을 줄 수 있어 참 좋은 취미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음식을 나누는 것은 치매를 이기고 외로움을 이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일 년 이상 고전했던 수고로움이 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인생에서 과감한 도전이었던 조리기능사 시험이 지금 나에게 새로운 성취와 행복감을 가져다주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