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의 시대가 감지된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화두는 정권 교체를 가로질러 우리 사회의 중심 토픽이고, 이제는 2016년 봄 이세돌 대국의 충격 때와 달리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가 ‘입신(入神)’이라고 일컬어지는 바둑 9단들 중에도 최고 수준의 기사라는 이를 가볍게 제압했다는 이야기가 깜짝 놀랄 뉴스로 여겨지지 않는다. 인공지능의 힘에 대한 인식이 어느 정도 정착되었다는 방증이다.

의료계에도 인공지능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국내 일부 병원에도 도입된 암 진단 인공지능 시스템 ‘왓슨 포 온콜로지(Watson for Oncology)’가 대표적인 사례다. 왓슨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산물이 아니다. 20년 전, IBM이 개발한 체스 컴퓨터 딥 블루가 당시 세계챔피언이었던 개리 카스파로프를 이겼다. 그 자체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큰 뉴스거리였다. 그러나 IBM은 체스의 승리에서 머물지 않고 마치 일찍이 계획했다는 듯이 다음 단계들로 전진했다. 다음이 왓슨(IBM Watson)이었다. 꽤 여러 해가 걸린 이 프로젝트는 2011년 인공지능 프로그램 왓슨이 미국의 유명한 퀴즈 프로그램 ‘제퍼디!’에서 이 프로그램의 가장 뛰어난 우승자들과 겨뤄 압도적인 점수(금액) 차이로 이김으로써 완성되었다. 당시 기술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이 성과는 IBM 왓슨이 자연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불명료한 유관성의 관계들을 처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오늘 세계 여러 나라의 병원에서 선보이고 있는 왓슨 포 온콜로지는 이런 개발 과정의 한 가닥이 낳은 결정체다. ¹

왓슨이 가진 역량의 핵심은 다양하고 방대한 자료를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전문가라도 결코 한 사람의 머리로는 기억할 수 없는 양의 의학 자료를 왓슨은 한 해가 다르게 발전해 온 하드웨어와 컴퓨팅 기술을 활용해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로 검색하고 처리한다. 그것은 귀납적 관점에서 유사성과 유관성의 관계를 평가하고 그 결과를 계산하여 제시하는, 어찌 보면 아주 단순한 기술이다.² 그러나 족히 업계의 지각 변동을 예고할 만큼 충분히 강력한 기술이다.

작년과 올해 이세돌과 커제가 알파고에게 지는 것을 지켜본 많은 사람은 바둑에서 고수들이 가지는 ‘직관’(intuition)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고수들의 직관이 신비한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어쩌면 뛰어난 전문가들끼리 겨루는 고급 경험을 통해 축적된 자료를 토대로 한 귀납(induction)의 결정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런 해석이 전문가적 직관의 가치를 폄훼하게 하는가? 아니다. 인류 문명을 오늘까지 발전시켜 온 집단적 인지능력의 핵심에는 오히려 그와 같은 귀납의 지혜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분명해 보이는 것은 왓슨 포 온콜로지 같은 인공지능 시스템이 환자의 진료 기록으로부터 그의 병증을 읽고 나아가 치료법을 제시하는 일까지 어느 인간 의사 못지않게, 혹은 어느 인간 의사보다도 더 잘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수많은 의사들을 집에서 쉬거나 전업하도록 만들 악마의 기술인가? 그것은 근거 없는 예측이라고 생각된다. 오히려 인공지능 기반의 의료는 증거기반의학과 정밀의학이라는 두 트렌드 이념을 수렴시킬 훌륭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인공지능 기술이 의료계에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일는지 모르지만, 왓슨에 무심한 대형 대학병원들도 일찍부터 수술로봇 다빈치를 도입해 활용하고 있다. 다빈치 수술에서 수술을 하는 것은 집도의지만, 환자의 환부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의사의 손이 아니라 로봇 팔들이다. 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왓슨과 다빈치는 둘 다 인간을 ‘확장한’ 경우들이다. 다빈치는 집도의의 두 손과 두 눈을 연장한다. 그 연장 부분에 포함된 테크놀로지는 일반적인 수술 환경에서 의사의 시각이 지니는 한계를 확장하고 손동작의 정밀도와 안정성을 배가한다.

왓슨의 경우 인간 의사는 얼핏 보면 왓슨의 진단을 검토하고 추인하는 - 사람보다 인공지능을 더 신뢰하는 환자가 보기에는 군더더기일 - 역할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이상의 근본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왓슨이 토대로 삼는 데이터는 의학 교과서와 논문들뿐만 아니라 진료 기록과 영상자료까지 원칙적으로 모두 인간이, 의사들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기여가 다빈치의 경우처럼 실시간 방식이 아니어서 눈에 띄지 않을 뿐이다. 수술로봇 다빈치 같은 실시간 연장의 경우에도 ‘연장된’ 기계적 요소에 점점 고도의 인공지능 기술이 응용될 것이고, 인간 의사 고유의 기여와 인공지능 혹은 로보틱스의 기여는 둘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한 방식으로 활발하게 접속될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차원에서 변동을 예고한다. 의료 관련 인력의 기여가 전보다 더 필요한 영역과 덜 필요한 영역, 그리고 새로이 필요한 영역이 생겨날 것이다. ‘의료 관련 인력’은 전문의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의료 데이터를 다룰 수 있는 중간 전문인력의 수요가 증대되리라는 예측이 있고, 간호학 교육의 일각에서 이 방향의 발 빠른 대응이 감지된다는 소식도 있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인해 예견되는 또 다른 거시적 변화는 의료의 무게중심이 치료로부터 건강관리로 이동하게 되는 일이다. 사람들이 저마다 주머니 속에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폰에 탑재된 건강관리 앱이 그런 변화의 핵심 동력이 될 것이다. 그로 인해 어떤 수준과 양상의 의료 평탄화 효과가 발생할 지는 아직 예견하기 어렵다. 동시에 그런 변동에 어떤 위험이 내재하는지도 주목하고 살필 일이다.

아직 전모를 내다볼 수 없는 다면적이고 거시적인 변동을 감지하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근본적인 물음이다. 의료는 무엇이고, 의사는 무얼 하는 사람인가? 필자의 소박한 생각에 의료는 돌보는 일(caring)이고, 의사는 돌보는 사람이다. ³인공지능 시스템이나 지능형 로봇은 그 어떤 수준의 훌륭한 것이라고 해도, 돌봄의 도구일 뿐 돌봄의 주체가 될 수 없다. 혹여 생겨날지 모르는 근거 없는 두려움(AI-phobia)과 인공지능의 위력에 매료되어 그것을 물신화하는 오류를 모두 경계하면서, 이 새로운 도구를 어떻게 잘 활용하여 더 훌륭한 돌봄의 틀을 마련할 수 있을지를 의료계와 사회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1. ‘왓슨 포 지노믹스’ 등 ‘왓슨 포 …’ 시리즈는 줄을 잇는다. https://www.ibm.com/watson/health/ 참조.

2. 여기에 예컨대 최근 인공지능 분야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기계학습’의 요소는 적극적으로 응용되고 있지도 않다.

3. 돌봄의 관계가 반드시 권위주의적 개입(paternalism)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