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카치오의 소설 데카메론의 배경이 되는 1300년대 중반 중세유럽. 몽골족의 침략 이후에 극동지방에서 괴이한 질병이 넘어와 몇 개월 만에 유럽 전역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 질병은 아프리카 북부와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유럽 전역으로 급속하게 퍼져 2년이 조금 넘는 기간에 유럽 인구의 4분의 1이 넘는 2,500만 명이 사망했다. 바이러스가 아닌 예르시니아 페스티스라는 박테리아에 의한 이 질병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에서 치명적 질환을 일으키고 있지만, 특히 중세 유럽에서는 엄청난 인구감소 및 사회 경제적 피해를 일으켰다. 그 결과로 중세 유럽의 장원 경제 체제와 이에 기초한 봉건영주제도가 붕괴하였고, 프랑스어가 지배하던 영국의 상류층 언어도 교사들이 많이 사망하는 바람에 영어가 득세하였다고 한다. 또한, 수도원과 성직자들의 수준과 윤리의식이 떨어지면서 종교개혁의 단초가 되었다고도 한다. 그 이면에는 항생제가 없던 시기 흑사병이라 불린 페스트의 치명률도 역할을 했지만, 질병에 대처하는 사회, 문화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질병이 돌기 시작하자 가장 먼저 도피한 사람들은 귀족들과 장인 출신의 부자들, 그리고 성직자들이었다. 많은 성직자들은 문을 걸어닫고 수도원에 은신하였다고 한다. 질병을 예방, 치료하고 사회를 안심시켜야 할 지도층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신의 징벌이라고 자포자기하는 분위기도 만연했고, 교회는 1350년을 성년(聖年)으로 선포하여 많은 사람들이 로마로 순례를 하도록 하면서 질병을 더욱 퍼트리는데 일조하였다. 결국 혼란에 빠져버린 시민들은 소문에 의지하면서 엉뚱하게 개와 고양이를 도살하여 오히려 쥐를 창궐하게 하였고, 마녀사냥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고, 각종 미신과 부적, 만병통치약과 근거 없는 치료법들이 횡행하였다고 한다. 즉, 페스트는 신체적인 질병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심리적인 위축과 공포를 일으켜서 사회전체에 집단적 공황증상을 일으켰고, 이를 안심시키고 지도해야 할 사람들이 도망가 버림으로써 지속적인 피해와 후유증을 만들어낸 것이다.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거나 긴장을 하게 되면 작은 일에도 쉽게 놀라고 예민해진다. 인간의 전두엽은 평소에 놀람, 공포 같은 감정 반응을 자제하고 외부의 위협을 적절하게 판단하여 대응하도록 진화하여 왔지만, 스트레스 상황에 놓여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면 편도가 과도하게 흥분하고 전두엽의 이성적 판단은 마비된다. 이로 인해 공황장애 같은 불안증상이 나타나고 막연한 불안함에 근거한 집단적 히스테리를 보이기도 한다. 전투 상황이라면 당연히 긴장하고 작은 일에도 세심한 반응을 보여야 하지만, 일상적인 상황이라면 오히려 지나친 예민함이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서 우울감과 분노감을 적절하게 속으로 해결하지 못할 때 선택하는 심리적 방어기제 중 하나가 투사(projection)이다. 이는 내 안에 있을 수도 있는 안 좋은 면을 누군가 외부의 탓으로 돌리는 것으로서 소위 희생양을 찾아서 “네 탓”을 하고 그렇게 해야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다. 관동대지진 당시 우물에 독을 풀었다며, 재일 한국인들을 지목하고 테러를 자행했던 일부 일본 사람들이 그랬고, 사스가 유행했을 때, 미개한 식문화 때문이라며 홍콩 등 중국 사람들을 백안시했던 우리들도 그랬다. 이런 현상은 개인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도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며, 가정이나 직장, 사회의 모든 현장에서 경험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부족한 정보와 소문에 근거하여 분노와 공황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중이 비과학적이고 다소 비정상적일 정도의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어느 정도 정상적인 반응일 수 있다. 성숙한 인간이라면 닥친 현실을 냉정하게 판단하려고 노력하면서 소문과 루머에 휩싸여 감정에 휘둘리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필요하다. 다행히 SNS와 메시지 등을 통해 각종 루머와 괴담이 양산되고 공포를 부추기는 현상은 예전과 비교하여 어느 정도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 수많은 부정적인 경험을 하면서 우리의 시민의식이 일정부분 성숙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박하고 두려운 일이 터졌을 때, 모든 사람에게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하여 행동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집에 불이 났을 때 가장은 가족 구성원을 안심시키고, 신속한 판단으로 구체적인 행동을 지시하여 도피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사회적인 재난 상황에서 집단 구성원을 잘 다독이고, 이런 현상을 잘 다루는 것이 리더십이다. 필요하다면 상황에 따라 전문가들에게 판단과 집행을 결정할 권한을 주는 것도 지도자가 할 일이다. 리더에게 문제해결의 의지나 능력이 없다면 그 집단의 미래는 늘 불투명하고 운에 맡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의료인을 포함한 국민들이 모두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예민해져 있지만, 잘 극복한다면 더 좋은 사회로 발전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중세유럽의 흑사병도 엄청난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이후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경제의 유동성을 증가시켰다. 학자들은 이것이 이후 자본주의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고 말한다. 답답함을 많이 느끼는 요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그런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이유는 늘 자신의 위치에서 제 몫을 다하려고 노력하는 일반 국민들 덕분이다. 이번 메르스 사태와 관련하여 애매한 희생양이 되어 욕도 먹고, 질병의 위협에 노출되면서도 환자 치료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의사, 간호사 등의 의료진과 병원 직원들 덕분에 이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