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로서 일을 할 때, 의사윤리지침이 실제적인 나침판이 되고 있습니까? 의료 현장에서 윤리적인 딜레마를 만났을 때, 갈 길을 밝혀주는 지침이 됩니까? 세계 각국의 의사윤리지침은 각 나라의 의사들이 스스로 규제할 가치의 원천을 다룹니다. 의사들이 어떻게 전문직윤리의 핵심가치를 매일의 진료에 적용할 것인가를 알려줍니다. 윤리원칙과 실제 세계의 딜레마를 연결시켜서 의사들의 결정과 실천을 안내하는 살아 움직이는 문서입니다. 따라서 의사윤리지침은 의학과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서 의사들이 계속 진화 · 발전시켜야할 문서입니다. 우리나라의 의사윤리지침은 2006년에 개정된 이래 8년이 넘도록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지난 8년간 우리 사회의 의료 환경이 급격히 변했으며 의료와 생명윤리에 관한 법률이 수차례 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의사윤리지침은 2006년 시점에 고착되어 화석화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의 의사들에게 살아있는 지침이 될 수 없습니다. 의사들에게 도움이 되는 실질적인 윤리 지침이 될 수 있도록 대한의사협회의 의사윤리강령과 지침은 개정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질병을 치유하는 의사는 고대로부터 독자적인 윤리강령을 가진 전문직이었습니다. 지금도 여러 의과대학 캠퍼스에 있는 기원전 5세기의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환자에 대한 의사의 윤리와 책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21세기의 의사는 사회구성원의 질병치유와 건강유지를 위한 고도의 전문화된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는 의료전문직(medical professional)으로서, 윤리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높은 수준의 직업적 표준을 자율적으로 관리하는 직업입니다. 사회 구성원의 건강 수호와 보건의료 향상이라는 중요한 의료전문직의 역할과 사명이 있기 때문에, 정부나 사회구성원이 아니라 의사들 스스로가 의학교육과 면허의 기준을 관리하고 의사집단의 가치와 윤리, 표준을 제시하며 구성원의 행위를 통제하도록 자율성과 권한이 부여된 것입니다. 사회로부터 신뢰와 배타적 특권을 부여받고 환자와 사회에 대한 책무가 있는 의사들에게 윤리는 의료전문직업성(medical professionalism)의 핵심입니다. 대한의사협회는 1961년 10월 「의사의 윤리」를 제정하여 의사들이 지켜야 할 의료윤리의 원칙을 제시하였습니다. 1964년 그 산하에 윤리위원회를 두었으나 활동이 활발하지 않다가 1995년 이를 전면 개정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기존의 「의사의 윤리」를 폐지하고 1997년 「의사윤리선언」을 제정하고 이를 구체화하여 「의사윤리강령」을 만들었습니다. 2001년에는 구체적인 의료 행위의 윤리성을 판단하는 실무지침으로 「의사윤리지침」을 제정하였습니다.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의사윤리 강령과 지침은 2006년에 만들어졌는데, 의협에서는 기존의 「의사윤리선언」을 폐지하고 「의사윤리강령」의 전문을 개정하여 이것으로 통폐합하였습니다. 의사윤리강령에서 이전의 장의 구분을 없애고 8개항으로 줄여서 가) 의사의 일반적 권리와 의무(제1호~제3호) 나) 환자와의 관계 및 사회적 역할(제4호~제6호) 다) 시술과 의학연구(제7호~제8호)로 구성하였습니다. 의사윤리강령이 의사들의 윤리에 대한 핵심적이고 선언적인 내용을 간결하게 정리한 것이라면, 이를 실천적인 차원으로 구체화한 것이 「의사윤리지침」입니다. 의사윤리지침도 이전의 ‘장’의 구분을 폐지하고 의사윤리강령 내용을 구체화하여 가) 의사의 일반적 권리와 의무(제1조~제4조) 나) 환자와의 관계 및 사회적 역할(제5조~제13조) 다) 시술과 의학연구(제14조~제30조)로 구성되었습니다. 대한의사협회는 2006년에 개정을 하게 된 이유로 (1) 사회제도 및 국민의식구조 변화에 따른 현실 반영 (2) 의사와 환자의 대등 관계 구현 (3) 의사 모두가 공감, 자율적 준수 유도 (4) 소신 진료를 위한 사회적 책임의 구체화 (5) 환자의 자율성 존중 및 의사의 책임 구체화 (6) 제정자의 취지 고려를 들었습니다. 2001년의 지침은 광범위한 의견수렴 절차를 거쳐 만들어졌지만, 2006년의 윤리지침의 개정에는 의견수렴이 폭넓지 않았으며 지침의 범위가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또한 이전에 윤리강령과 지침에 모두 있었던 ‘윤리위원회’에 대한 내용은 두 문서에서 모두 삭제되었습니다. 2012년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에서 제시한 기본의학교육 학습 성과 중 일반학습성과의 <윤리와 법> 영역을 보면 의대생들은 “진료상황에 맞는 의사협회의 의료인 윤리규정을 알고 일상 진료에서 규제와 법적 제한을 지킬 수 있다”고 하여 의대생의 윤리교육에서 의사협회의 윤리지침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도록 명시하였습니다. 갈수록 의사의 전문직업성과 전문직윤리가 강조되는 현실에서 의사협회의 윤리강령, 지침 등의 윤리규약은 의과대학생의 교육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됩니다. 서울의대의 졸업식에서는 졸업생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 대신에 2006년도 개정된 8개 조항의 의사윤리강령을 선서합니다. 이를 보면 의사윤리강령은 의과대학생들이 의업에 종사할 자격을 부여받기 전 함께 집단적으로 선서를 하는, 내용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중요한 문서로 자리 잡은 듯 보입니다. 현재의 의사윤리강령과 의사윤리지침 이대로 우리 의과대학생들에게 계속 교육하고 선서하도록 해도 될까요? 현재의 대한의사협회의 의사윤리지침이 국제적 보편성과 국내의 현실성을 두루 갖추고 있어 의사들에게 실제적인 지침으로서 기능을 하는지 검토해야할 시점입니다. 의사윤리강령은 의사 개인과 의사 집단이 전문직으로서 헌신해야할 가치와 의학의 가치를 천명하고 의사윤리지침은 이를 실현할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국제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생명의료윤리의 네 가지 원칙-자율성존중, 해악금지, 선행, 정의-에 비추어볼 때, 현재의 지침에서는 정의의 원칙은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의 지침은 장기이식, 인공수태시술, 연명치료, 의학연구 등에 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으나 실제로 대부분의 의사들이 환자 진료에서 만나게 되는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의료윤리 문제들에 대해서는 충분히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의사윤리지침에 포함될 내용이 누락되었거나 의사윤리지침에 포함하기에 부적절하거나 현행법과 일치하지 않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개정한 지 8년이 지난 의사윤리지침을 살펴보면 지금의 용어나 개념과 맞지 않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8조의 경우 “8. 의사는 인체 및 생명공학 연구와 관련하여 피험자의 생명, 건강과 인격을 존중하고, 윤리적, 의학적, 사회적 타당성을 검토함으로써 의술 향상 및 인류의 건강 증진에 기여한다.”고 되어있는데 2012년 2월 국회에서 개정되어 2013년 2월부터 발효 중인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에서는 의학연구에서 ’실험을 당하는 사람’의 의미를 내포하는 ‘피험자(human subject)’라는 용어 대신에 ‘연구대상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또한 좁은 개념인 ‘인체 및 생명공학 연구’라는 말 대신에 ‘인간대상연구’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2006년 황우석 스캔들이라는 국제적인 연구부정행위를 겪은 이후 한국사회는 생명윤리와 연구윤리에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루었는데, 이러한 내용이 전혀 반영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의사윤리지침의 24조에서 30조까지가 의학연구윤리지침인데, 여기서도 현재의 국내의 발전된 내용을 반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의사윤리지침의 인공수태시술, 장기이식 등의 세부 내용에서도 그간의 법과 사회와 의학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사윤리강령의 문구 하나하나가 의료전문직의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지, 의사윤리지침은 의학과 사회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는지 정기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2006년 개정하면서 윤리위원회에 대한 내용이 모두 없어졌기 때문에, 그간 변화된 내용을 검토하여 의사윤리지침에 반영할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의사윤리지침은 대한민국의 의사 모두의 윤리지침입니다. 의사협회 뿐 아니라 대한의학회,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대한전공의협의회 등 여러 관련 단체에서 검토되고 의견 수렴을 거쳐 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의사윤리지침이 보편성과 실효성이 있는 문건이 되기 위해서는 대한의사협회가 의료윤리학회 등 관련 학회와의 협조를 통해 지난 8년간의 국내외의 변화들을 연구하고 의사들의 의견 수렴을 통해 개정하고, 이를 의료 현장에 확산하여 의료윤리 지침을 뿌리내리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