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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EWSLETTER No.156 January 2024

1분 소확행

◎ 취미가 진심이 되다(8) – 모형 범선의 세계

황 승 준울산의대 해부학

어린 시절 동경으로부터 시작된 작은 꿈이 있었다. 성인이 된 후, 어느 순간 현실로 다가와 설렘을 주는 취미가 되었다. ‘범선 만들기’ 였다. 이제는 범선 제작을 시작한 지도 25년 남짓 되었지만 국민학교 시절 프라모델 취미를 시작한 때부터 포함한다면 모형에 관심을 가진지는 50년 가까이 됨직한 취미이다. 그 시절엔 컴퓨터가 없어 적잖은 어린이들에게 ‘모형 만들기’는 꽤 인기가 있었다. 프라모델로 알려진 탱크, 전투기, 전함, 자동차 등을 만들며 청소년기에 세계대전, 혹은 밀리터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대학 시절에는 학업으로 인해 모형취미를 멀리할 수 밖에 없었는데, 졸업 후 기초의학 학위과정을 거치고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던 시기는 자유로운 해방기였다. 그 시기였다. 어느 신문의 여름 특집기사에서 30대 들의 특별한 취미 ‘모형취미의 끝판왕-목범선 만들기’ 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순간 그동안 오래도록 잊고 지내왔던 기억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나 범선을 만들어 보자는 열망과는 다르게 현실은 어려웠다. 어린 아기가 딸린 공중보건의의 궁색한 살림에 월급의 절반이 넘는 범선키트를 구입할 순 없었다. 대체 취미로 진공관앰프를 만드는 수준으로 마무리가 되었는데. 결국 복무 만기 후 울산의대에 전임으로 오면서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게 되었다. 인터넷이 웹기반으로 발전하여 해외 사이트를 통해 범선을 직구 할 수 있었다. 키트를 주문한 후 도착 전까지 그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퇴근 후 늦은 밤 시간을 짬 내어 만들어 나갔지만 만만치 않았다. 당시 국내에는 범선제작에 도움을 줄 만한 동호회가 전무하였거니와 부실한 설계도면 때문에 대부분의 초보자는 중간에 포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국은 혼자만의 힘으로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제작노하우를 스스로 터득해 나아가야만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첫 범선작품(우리들은 ‘작품’이라고 부른다)은 1999년도 여름이었다. 프랑스 해군의 스쿠너(쌍돛대)범선 ‘Le Hussard (1848년)’ 는 작고 빠른 작전용 전투함으로 초보인 내 눈에는 날렵한 선체가 매력적으로 보였다, 입문용이라 약 100시간 정도 투자하여 만들 수 있었다. 습작이다 보니 미흡한 부분이 눈에 띄어 지금은 다시 보수 작업을 통해 디테일 업을 하게 되었다.

첫 작품을 완성한 후, 그에 대한 감동을 뒤로하고 좀 더 거창한 범선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영화에도 등장했던 HMS Bounty 라는 배였다. '바운티호의 반란(Mutiny on the Bounty; 1962년 제작)'이라는 영화로 소개되어 전 세계에 가장 유명한 범선 중 하나가 되었다. 그 덕에 해외 여러 모델링 회사에서 키트화하여 판매되었는데 사실 유명세에 비해 그렇게 멋진 범선은 아닌 듯싶다. 이 배의 제작은 약 300시간 정도 소요되었지만 기간은 거의 1년 반 정도 걸려 완성되었다. 의욕이 앞서다 보니 제작 중 부주의로 손가락 말초 동맥도 베어보고, 손끝 살점도 떨어져 나가 지문이 소멸된 부위도 생기는 등 중간에 고초가 있었다.

차기로 만든 범선은 캐나다의 범선으로 역사상 가장 빠른 스쿠너 범선인 Blue Nose를 복원 제작한 후속기이다. 현재 캐나다의 루넌버그 항에 정박 중인 현역 범선이다. 이 범선을 제작하던 중, 인터넷 포털 사이트 Daum에 범선동호회 카페가 만들어졌고, 2001년에는 드디어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감격적인 대한민국 제1회 모형범선전시회가 개최되어 그간 완성한 작품을 출품하였다.


(H.M.S.Bounty, 1:48 Artesania Latina, Spain)
(Blue Nose II, 1:72 Artesania Latina, Spain)

2002년초 미국 유펜 신경학교실로 연수를 떠나 귀국 무렵, 미국 실험실 보스에게 우리나라 거북선(영공방, 1/100)을 제작(80시간 소요)하여 이별 선물로 선사하였다. 임진왜란과 이순신 장군의 설명과 함께 나름 한국의 이미지를 소개해 주고 싶었던 심정도 있었던 것 같다. 3년 뒤 학회 참석차 필라델피아를 재방문했을 때 그의 연구실에 간직해 놓은 거북선을 볼 수 있어 뿌듯함을 느꼈다. 이 후에 영화 명량해전도 보았고 좀 더 고증에 가깝게 디테일 업된 1/65 축적의 거북선을 다시 제작하게 되었다.


거북선 (영공방, 1:65, Korea)

연수 뒤 복귀하여 교육과 연구관련 업무를 수행하며 다음 작품으로는 1794년 건조된 영국 조지 2세의 유람용 배인 Royal Carolin을 선택하였다. 왕족의 배라 금빛 장식물이 많고 화려한 모습에 이끌렸다. 제작 시간은 총 200시간 정도 소요되는 중상급 수준의 범선이지만 그간의 노하우로 어렵지 않게 제작하여 2004년도 여름에 삼성동 현대백화점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동호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고무되어 이 전시회 후 그간에 얻어진 경험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좀 더 크고 복잡한 상급자용 범선을 만들어 보겠다는 의욕이 생기게 되었다.


(HMS Royal caroline, 1:48, parnat, Italy)

상급자용 범선인 전열함(전투용 범선, 대포가 줄을 지어 배치된 함)을 생각했었는데, 미국연수 기간 중에 현지에서 구입한 키트로 스웨덴의 전함을 선택하였다. 1611년 즉위한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아돌프 2세는 당시 발트해의 패권을 잡기 위해 제해권을 두고 독일 황제와 겨루면서 북유럽강자로 부상하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야심차게 추진한 작업이 전함 건조였고 바사(Wasa)호는 그 상징물이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함으로 1628년에 비로소 건조되었다. 1628년 8월 10일 스톡홀름 항구에서 많은 기대와 함께 진수하였으나 강한 바람에 의해 배가 기울면서 열린 포구를 통해 엄청난 바닷물이 들어와 순식간에 수 백 명의 선원과 함께 수장된 비운의 범선으로 알려져 있다. 범선의 기본 설계구조가 있었으나 국왕 명령으로 더 많은 대포를 장착하려고 무리한 구조변경과 지나치게 화려한 장식을 추가한 것이 배를 침몰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바사의 제작은 2004년 경 시작하였지만 제공된 설계도의 부실과 어려운 제작기법으로 거의 10년간 차일피일 미뤄지며 제작 진도는 지지부진하였다. 그러던 차에 우리나라 세월호 침몰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바사호의 역사적 교훈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범선 바사는 침몰 333년 만인 1961년에 침몰 당시의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났고 보존처리를 통해 1990년 개관한 스톡홀름 바사 박물관에 영구 보존되어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Youtube를 검색하면 바사의 건조과정과 침몰 순간, 그리고 인양 장면의 다큐멘터리 재연 영상을 볼 수 있다. 범선 바사는 제작 당시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되었지만 지금은 스웨덴 스톡홀름을 대표하는 관광자원으로 후손들에게 그 이상의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하니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북유럽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에게는 스톡홀름의 박물관을 들러 실제 범선을 관람하는 것이 유명코스로 알려져 있다.

무슨 연유였는지 간간이 제작하던 습성을 탈피하여 범선 제작에 몰두하여 2018년초 마무리 하였다. 결과적으로 범선 ‘Wasa’는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14년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오랜 기간이 걸려 마무리하게 된 변명은 방학기간을 이용해 조금씩 제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기도 하지만, 난해한 설계 도면이 제작자의 의지를 자주 겪은 탓이 제일 크다고 보겠다. 뿐 아니라 워낙 잘 알려진 범선이라 축척의 단순화로 생략된 부분을 찾아내어 실제 범선처럼 선체 곳곳에 디테일을 표현하기 위한 고증의 노력이 무척 많이 소요된 탓이기도 하다. 총 투자시간은 1,000시간 이상 소요된 것으로 추산되며 그간 포기하지 않고 마무리하게 되어 성취감이 더욱 크다. 2018년도 3월 제10회 더하비페어(성남아트홀) 범선 부문으로 출품하여 많은 관심을 받기도 하였다.


[Wasa 1628, 1:75, Corel, Italy]

이외에도 ‘Wasa’ 제작 후 머리를 식히는 겸 어렵지 않고 의미를 둘 수 있을만한 찰스 다윈 ‘종의 기원’ 의 역사적 바탕이 되는 비글호항해기의 주역 범선 ‘HMS Beagle’을 제작하였다.

이처럼 특별한 역사적 배경을 가진 범선은 다른 나라에서도 다양하게 찾을 수 있는데, 영국은 프랑스와의 트라팔가 해전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넬슨제독의 기함 HMS Victory(1765년)가 대표적이며 현재 포츠머스 항에 박물관 형식으로 남겨져 공개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1797년 조지 워싱턴의 지시로 제작된 USS 컨스티튜션호 (USS Constitution ship)는 많은 해전에서 프랑스나 영국의 전함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둔 자랑스러운 미국 군함으로 알려져 있으며 보스턴 찰스타운 지역에 박물관으로 정박 중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미국 대통령 집무실이 나오는 장면을 살펴보면 종종 배경에 등장하는 모형 범선으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작해 보고 싶은 범선이기도 하다.

범선을 제작하면서 1400-1700년대의 대항해시대 유럽이 어떻게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는가. 개척과 도전 속에 세계사의 흥망성쇠를 짐작하게 하는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모형 목범선 제작 취미는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 진입 장벽이 높기는 하지만 집중력과 인내심이 갖춰졌다면 추천하고 싶은 취미로 제작과정의 진척을 통해 잔잔한 감동을 끊임없이 전해주는 장점이 있다. 설명하기 어려운 행복의 감동을 느끼기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으나 이 또한 악기나 미술등과 같이 어떤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경험적 취미이기에 더욱 가슴깊이 진하게 와 닿는 행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섬세한 작업을 하기에는 시력이 아쉽지만 허락된 시간만이라도 이 열정을 오래 간직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 필자 약력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교실 교수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서울아산병원 교수협의회 회장
서울아산병원 임상해부교육센터 소장

대한의학회(https://www.kams.or.kr)
(06653)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대로 14길 42, 6층/7층 (서초동, 하이앤드타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