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성 민
이뮤노포지 대표
멜버른 대학에서 박사 과정 중일 때 제 고민은 의과대학을 졸업해 MD-PhD가 되겠다고 하는 제가 실험실 내의 다른 PhD 학생들과 어떻게 차별화할 수 있는 가였습니다. 이 질문은 국내에서 의사과학자를 꿈꾸면서 박사과정에 진학한 많은 MD 들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 스스로 답을 얻는데 십여 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고 그 해답의 끝에는 중개의학(Translational Science)과 신약개발이 있었습니다.
이 삽화는 2008년 Nature에 기고된 Translational Research: Crossing the Valley of Death라는 글에 실렸으며 의학연구에서 기초연구가 임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국 NIH는 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2011년 NCATS(National Center for Advancing Translational Sciences)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중개의학을 발전시키기 시작합니다. 마침 이 때는 제가 2009년 조교수로 임용되어 첫 걸음을 떼기 시작한 때와 맞물렸고 그렇게 제 중개의학에 대한 고민과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중개연구(Translational Research)와 중개의학(Translational Science)은 대단히 다양한 의미로 혼용되고 있습니다. 제가 받아들인 중개연구(Translational Research)의 막연한 의미는 무언가 임상과 연결될 수 있는 기초연구 정도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위의 삽화만 보더라도 이런 접근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Human과 연관된 모든 연구(심지어는 Human이 아닌 대상에 관한 많은 연구)가 궁극적으로 임상과 연결을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달리 중개의학(Translational Science)의 본질은 “프로세스를 개선”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산업공학이 추구하는 바와 맞닿아 있습니다.
산업공학은 모든 체계를 조화롭게 관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공학으로서 시스템과 인터페이스의 최적화와 효율성 극대화에 초점을 맞춘 학문입니다. 산업공학적 측면에서 보면 신약개발은 개별 시스템과 인터페이스가 대단히 비효율적인 분야입니다. 현재 알려진 수많은 질환 중에서 95%는 치료제가 없고, 나머지 5% 질환에서도 치료제 하나를 개발하는데 수천억의 비용과 10-15년이 소요되지만 전체 성공률은 5%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개의학에서는 이러한 원인이 신약개발의 비효율적인 프로세스에 있다고 보고 이를 개선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신약개발을 위해서는 기초연구(생물학 및 질병의 기전연구), 비임상연구(약물후보의 유효성 및 독성연구), 임상연구, 임상적용 및 공중 보건에 이르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일이 필요합니다. 각 분야마다 개별 시스템적으로 일이 진행되며, 분야마다의 인터페이스가 중요합니다. 신약개발의 비효율성은 개별 시스템의 전문가는 있지만 이를 넘어서 전체 프로세스를 효율적으로 혁신할 수 있는 중개의학자(Translational Scientist)가 없다는 점에 기인하며, 미국과 유럽에서는 중개의학자를 양성하기 위해 정교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기에 이르렀습니다.
중개의학자는 한 마디로 T자형 인재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신약개발의 한 분야에서(기초, 비임상, 임상 어느 분야 건) 전문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분야를 이해하고 분야와 분야가 연결되는 프로세스를 혁신할 수 있으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시스템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꼭 MD-PhD가 아니더라도 중개의학자가 될 수 있으며 그런 방향의 교육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 짧은 경험상 MD-PhD가 성공적인 중개의학자로 활약할 수 있는 가장 큰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 이유는 기초 및 비임상 분야의 진입장벽 보다는 임상 분야의 진입장벽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제가 창업한 이뮤노포지㈜라는 회사에서는 현재 한 개의 임상2상 연구가 진행 중이며, 올해 별도의 임상2상 및 1상 연구 승인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신약들의 초기 단계 연구가 진행 중입니다. 초기 개발 및 비임상연구, 임상연구, 사업개발 모든 분야에서 훌륭한 전문가들이 갖추어져 있고 그런 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것이 제게는 큰 행운이자 즐거움입니다. 각 시스템별 전문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개별 시스템과 인터페이스를 최적화하고 효율을 극대화하는 중개의학자(Translational Scientist)로서의 제 역할이 있으며, 특별히 공동대표의 위치에서 그러한 역할이 신약개발회사인 이뮤노포지㈜를 차별화할 수 있는 역량 중 하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대한의학회가 주관하는 제8회 이민화 의료창업상(창업부문)을 수상하게 된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MD-PhD에서 중개의학, 신약개발로 이어진 제 경험이 한편으로는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어느 후학에게, 다른 한 편으로는 의사과학자를 어떤 방향으로 양성해야 하는지 고민하시는 대한의학회에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글을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