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유 경대한의학회 정책이사/순천향대학교 부속 부천병원 교수
중개연구는 기초연구 성과의 현장 적용 실패율이 높은 문제를 극복하고자 도입된 개념이다. 우리나라도 2000년대 초반 질병 중심 중개연구와 질환 극복 기술 개발사업의 형태로 도입되었고, 지금까지 다양한 사업의 형태로 수행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 중개연구가 탄생하게 된 이유에 기반하여 그 정신을 구현하는 사업이 있는가? 적어도 의료분야에서는 아직 잘 모르겠다. 정답을 알 수 없으나 대한의학회와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임상 현장 수요연계형 중개연구 사업(2024~2028년, 총 5년)을 통해 한국형 중개연구를 구현하기 위해 협업하고 있다. 이를 담당하는 기구로서 대한의학회 중개연구센터가 2024년 첫 업무를 시작하였고, 현재 6개 질환계 워킹그룹과 각 질환계당 5개 연구팀, 총 30개 연구팀과 함께 한국형 중개연구 촉진 모델의 구축과 적용을 동시에 시도하고 있다.
나는 “한국형 모델”이란 단어에 대한 근본적 거부감이 있다. 그러나 미국의 엄청난 자금력과 인력을 투입하는 NCATS 시스템을 검토한 후, “한국형” 모델의 필요성을 부인하긴 어려웠다. 엄청난 규모의 예산과 의사 인력을 확보하면서, 연구관리와 직접 참여 기능을 갖는 NCATS와 비교 가능한 기관이 우리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구관리 기관으로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은 연구관리에 역사와 경험을 축적하였으나, 의학 연구의 전문성이 부족하다. 반면, 대한의학회는 의학과 연구 측면에서 유능하지만, 연구관리는 그렇지 않다. 모든 시도가 중개연구팀의 성공을 위한 촉진자(facilitator) 혹은 촉매자(catalyst) 역할을 강하게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이 프로그램을 ‘한국형 중개연구 촉진 모델’로 감히 제안한다. 조금 늦었지만, 우리 중개연구센터는 2025년 7월 3일 공식 개소식을 앞두고 있다. 이 뉴스레터 지면을 빌어 한국형 중개연구 촉진 모델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형 중개연구 촉진 모델의 핵심 ‘질환계 워킹그룹’
질환계 워킹그룹은 질환의 내과, 외과, 또는 진단 등 다양한 관점을 대표할 수 있도록 관련 기간 학회(전문의 배출학회)의 공식 추천을 받아 위원을 선임한다. 중개연구에 참여하는 과제는 당연히 그 과정에 현실 제품이 존재하지 않는다. 위원들은 다양한 회의에서 연구팀이 추구하는 가상의 목표물을 중심으로 위원들은 각자의 전문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문 의견을 제시한다. 일종의 사고실험 참여지만, 모든 회의에 ‘사고실험’이란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질환계 워킹그룹과 연구팀은 연간 2회 이상의 이러한 토론 기회를 3년간 반복하며, 연구의 마일스톤이 진행됨에 따라 논의의 내용도 점차 현장 적용, 즉 개념검증에서 출발해 시작품/시제품, 비임상 및 임상시험 등, 과제의 마일스톤 진행에 따라 성숙해 갈 수 있는 구조이다. 특히 질환계 워킹그룹의 위원은 중개연구센터에서 관리하는 연구과제의 연구책임자 및 연구원 참여도 제한하고 있으므로, 이해 상충의 발생 가능성을 원천 배제하였다. 자문회의의 형태를 띤 워킹그룹에 의한 주기적이고 반복적 개입은 연구의 진행이 연구팀의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과 경험적 판단(heuristics)으로 인한 편향을 견제하고, 임상 맥락을 무시한 기술 중심의 연구개발 위험성을 최소화하는 아주 중요한 장치라 할 수 있다.
미충족 수요, 연구 수요와 현장 수요
수요 조사를 모두 모은 후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연구 수요’의 의도를 강하게 담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다. 예를 들어, A 특성을 갖는 환자군을 신속히 진단할 필요성이 의료현장에 존재할 때, 대개 수요 조사에는 진단의 방법으로 XYZ라는 특별한 기술을 활용해야 한다는 수요가 제안되고, 이는 그 수요를 제안한 주체가 강점을 갖는 기술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의료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A 특성을 갖는 환자를 빨리 진단하여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 신속한 진단 방법에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은 XYZ, 그 이외 무엇이 존재할지는 아직 다 알 수 없다. BCD, QRS 등 과학기술계에서 새롭게 대두되는 후보 기술들에게 기회는 열려 있어야 하고, 경쟁에 의해 최선의 방법이 채택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모델에서 현장의 수요 수집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나, 주제 결정을 위한 선별 과정에는 임상 현장의 핵심 질문(key clinical question)인 대상군(target population, P)과 진단 혹은 치료 등의 개입(intervention, I) 방법인 모달리티 개발이 왜 필요한가(outcome, O)를 중심으로 논의하는 원칙을 도입하였다. 중개연구 공모에 제시하는 수요의 표현은 대상군과 필요한 모달리티만을 포함한다. 이 논의와 선정의 과정은 당연히 중개연구 촉진 모델의 핵심인 질환계 워킹그룹이 참여한다.
의료 현장 적용 모델 ‘사용 목적(intended use)’
나는 다양한 기회에 발표와 논문을 통해 중개연구는 미충족 수요를 의료 현장의 적용모델인 ‘사용 목적’으로 번역 또는 전환(translation)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의료 현장의 미충족 수요는 반드시 어떤 의료행위의 절차를 둘러싼 의료인, 환경, 기기, 설비, 일의 순서 등 많은 요소들이 복합된 현장의 맥락이 존재한다. 때문에 미충족 수요는 그것이 속한 맥락과 함께 논의되어야만 한다. 맥락이 소실되고 미충족 수요에만 집중하는 연구개발(technology-centered approach)은 기술 구현을 통해 수요를 해소한 것처럼 보여 질 수는 있다. 그러나 과연 의료현장까지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중개연구팀의 미충족 수요가 도출된 그 현장의 맥락을 포함하여 분명한 현장 적용모델 즉, 누가, 언제, 누구에게,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왜 사용하는가에 대한 내용으로 포함하는 사용 목적으로 명확하게 정의해야 한다. 사용 목적을 설계하는 양식은 대한의학회 공식학술지 JKMS를 통해 누구든 연구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공개하였다. 중개연구센터에서 진행하는 연구팀과 함께 진행하는 다양한 회의나 컨퍼런스는 질환계 워킹그룹의 다학제 전문가들과 함께 지금 연구개발 성과물이 의료현장에 어떻게 적용될지 혹은 다른 대안이 존재하는지 등 바로 현장 적용 모델을 중심에 두고 토론이 이루어진다. 앞서 언급한 이른바 연구팀과 다학제 자문팀이 함께하는 사고실험이다. 설정된 사용 목적은 연구 종료 시까지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PDCA 싸이클을 진행과 함께 일관성을 유지하며, 업데이트, 관리되어야 할 것이다.
협업(collaboration)의 촉진
중개연구의 특성상, 중개연구 과제팀은 임상 전문가팀과 제품화팀 최소한 2개의 공동연구팀이 참여한다. 다학제 연구팀 간의 공통 목표 달성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협업(collaboration)’의 실현이다. 중개연구센터에서 관리하는 연구팀 내 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측정할 방법이 있을까? 우리는 협업의 정도를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협업을 유도할 방안으로 질환계 협의체 컨퍼런스와 개별 연구팀 기술자문회의 프로그램을 도입하였다. 모든 연구팀은 매년 최소 2회 이상 이러한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정기적 검토 과정을 갖게 된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이름으로는 어떠한 차별성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질환계 협의체 컨퍼런스는 동일 질환계 5개 과제팀과 워킹그룹이 모이는 연구발표와 자문의 시간이다. 개별연구팀만을 대상으로 한 자문회의인 기술자문회의 역시 연구발표와 자문의 시간이다. 연구의 마일스톤 진행에 따라 논의 내용이 진화하듯, 주기적인 질환계 협의체 컨퍼런스는 중개연구 진행의 PDCA 싸이클의 체크 기능을 담당한다. 2024년 연구를 시작한 팀들의 반복적 컨퍼런스 진행은 바로 이 점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즉, 중개연구 프로젝트 마일스톤 단계별로 검토 및 체크되어야 할 요소들이 다학제 자문회의를 통해 체크하고 연구팀의 성공적 마일스톤 진행을 지원한다.
맺음말
한국형 중개연구 촉진 모델은 질환계 워킹그룹을 중심으로 현장 수요의 선별과 연구 주제 제시, 다양한 포맷의 다학제 구성원이 참여하는 컨퍼런스와 자문 프로그램의 구축, 주기적 반복을 통해 마일스톤 진행에서 자연스러운 협업 유도와 PDCA 싸이클 실현 등을 내용으로 포함한다. 이 프로그램에 들어오는 개별 중개연구팀은 구축된 다양한 프로그램에 따라 일종의 간섭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러나 연구 내용은 연구팀 고유 영역이다. 그래서 이 모델이 추구하는 것은 facilitator 또는 catalyst로서 참여적 관리(participative management) 시스템의 구현이다. 또한 이 모델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서는 우수한 워킹그룹 위원의 확보와 유지가 매우 중요하고, 워킹그룹을 이끄는 PM의 뛰어난 리더십이 필요하다. '한국형 중개연구 촉진 모델'은 국내 중개연구의 성공률을 높이고자 하는 대한의학회의 의지를 담고 있다.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연구팀과의 상호작용 및 만족도 조사 등을 통해 모델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 또한 7월 3일 공식적 첫걸음을 떼는 센터의 개소식에도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