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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MS Hall of Fame

명주완 (1905 ∼ 1977) 한국정신의학, 보건의학 발전에 이바지한 지식인 (헌정일 : 2012-03-29)

공적사항

명주완은 1905년 서울에서 태어나 1919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였다. 학창 시절 그는 수학 천재로 이름이 높았다. 1924년에는 치열했던 경쟁률을 뚫고 경성제대 예과에 1회 입학하였다. 그는 1926년 5월 예과 졸업과 동시에 의학부에 진학하여 1930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의학부 졸업 후 약리학교실에서 연구를 하다가 1934년 정신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출신 정신과의사 1호이다. 그가 약리학교실을 떠나 정신의학을 연구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일제 강점기 일본인 우선주의로 인해 교수 승진의 길이 막혔기 때문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신경정신과교실을 택하게 된 것은 한국인이 별로 지원하지 않은 미개척 분야라는 점과 그가 약리학 검사에 밝아 신경정신과교실의 구보 주임 교수가 위촉받은 마약 중독에 관한 숙제보고를 작성하기가 수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라는 추정도 있다. 여하튼 신경정신과학교실의 구보 교수 밑에서 조수로 근무하던 그는 1938년 11월 <생체에 수입된 살리실리산(酸)의 운명>이라는 주제로 교토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성북병원이라는 정신과의원을 개업했는데 개업 연도에 대해서는 기록이 분분하다. 당시 성북병원은 50병상 규모로 평판도 좋았고 병원 운영도 꽤 잘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보다 먼저 도입되었던 인슐린혼수요법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조광(朝光)>이라는 잡지에 <폐결핵과 정신분리증>, 또 다른 잡지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등의 글을 기고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그는 조선인 인텔리 사회에 익숙한 정신과 전문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낙산의학회 창립을 주도하였는데 낙산의학회는 1935년 창립된 경성제대 조선인 출신의사들의 모임이었다. 그는 사교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해방 이후 한국정신의학, 보건의학 발전에 주춧돌을 놓는 작업을 하였다.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경성대학 의학부의 신경정신과학교실 초대 주임교수 겸 경성대학 의학부 초대 병원장이 되었으나 ‘국대안 사건’과 그가 연관된 이른바 ‘5교수 사건’에 연루되어 1949년 사임하였다.

명주완 교수는 해방 직후 가장 먼저 정신과 의사들을 규합하고 정신의학계의 원로인 심호섭을 회장으로 ‘조선신경정신의학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한국전쟁 도중 군에 입대하여 군진정신의학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1951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임시수도 부산에서 개교하자 군에 있으면서 외래 교수로 강의를 하였다. 1952년에는 한국군의관 도미 과정의 하나로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6개월간 연수하였으며 1956년 중령으로 5년간의 군 생활을 접고 제대하였다.

해방 정국과 정부 수립기, 한국전쟁과 같은 혼란한 시국에 세브란스의대, 경북대, 전남대 등에서 강의를 하면서 후학 양성에 열의를 보였다. 1955년에는 한국전쟁으로 와해됐던 ‘조선신경정신의학회’를 복구하고 1961년까지 학회장을 역임했고 1966년에서 1970년까지 대한의사협회 회장직을 역임했다. 1970년에는 조선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1971~1973년 조선의대 부속병원장과 정신과 과장을 겸하여 조선대 정신과의 초석을 세웠다. 국어순화운동을 벌이며 말년을 보냈고 1977년 작고했다.

요약컨대, 명주완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에 정신과학 연구와 교육을 통해 한국 정신과학 탄생과 발전에 초석을 세웠다. 또 조선신경정신의학회, 낙산의학회 등 의사단체 결성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대한의사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한국 의사사회를 규합하는데 힘쓰고 한국정신의학, 보건의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는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극심한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경성대학 의학부 초대 병원장으로 제 역할을 다했다.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후학양성에 힘썼고 신문과 잡지 기고 및 저술 활동도 꾸준히 하였다. 말년에는 국어순화운동을 하는 등 사회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한 그는 학식과 인격을 두루 갖춘 대학자이자 한국 정신과학 발전의 주춧돌을 마련한 대부(大父)이며 당대의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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